독서 자료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산] 2021. 8. 30. 09:23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그 대답은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가장 큰 이유는 자기 존재를 성숙시켜나가는 데 있지 않을까. 존재의 완성이란 결코 달성될 수 있는 목표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완성을 향해 걸어가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의미를 갖지 않을까. 그래서 인간을 나그네인 존재homo viator, 영원히 길 위에 있는 나그네라고 말했던 것 같다.

 

인간은 생물학적이거나 현실적 차원을 넘어 예술을 통해 존재론적 의미 지평에 자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누구나 예술가다. 그 예술이 반드시 전문적 교육을 받아야만 가능한 것일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아름다움을 느끼고 표현하는 인간은 누구나 예술가이며, 그 모두는 우리의 의미체험과 결단에 관계되는 것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수밖에 없으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공존재로서 인간은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 쓰는 존재, 즉 배려의 존재인 것이다. 이 마음 쓰임이 바로 하이데거가 생각하는 실존성의 출발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세계 안에 존재하며 어쩔 수 없이 이 세계에 제약되어 있지만, 조건적 특성을 넘어 자기 자신을 가능성이 있는 고유한 존재로 만들어 간다. 또한 개인의 존재적 특성 외에도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공동 존재라는 특성을 지닌다.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는 것

 

프랑스의 철학자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은 나의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는 다른 사람인 타자이며, 타자와 만나고 맺어가는 관계가 결국 나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거울이 된다. 레비나스는 타자와 “얼굴을 마주보는”관계가 인간의 진정한 관계 맺음이라고 말한다. 사람은 나 아닌 타자를 참으로 만날 때 비로소 진정한 나가 된다.

 

사실 인간의 가장 큰 본성은 사랑일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사랑하고, 또 끊임없이 무언가를 사랑한다. 사랑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만들며 죽음보다 강하다. 사람은 언제나 사랑 안에서 살고 있다. 그 사랑이 이성에 대한 열정일 필요는 어디에도 없지만, 사랑을 통해 사람은 사람으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지금 죽은 사람처럼 살아 있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사랑할 사람, 타자를 필요로 한다.

 

나의 실존과 연관하여 타자를 피해갈 수는 없지만, 그와 동시에 타자는 더불어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나의 지옥”이라고 말했지만, 그럼에도 타자에 대한 책임을 위해 자신의 존재를 걸고 투쟁하기도 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으로서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관계를 정립하고 타자라는 존재에 깃든 모순성을 극복하는 과정으로 이해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내 안의 타자를 받아들이고 그 타자의 크기를 키우는 길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는 그러한 과정에 있으며, 그러한 길을 걸어가는 존재일 것이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가치와 의미는 이런 과정에서 올바르게 매겨지고, 이 모순과 갈등을 넘어서는 것이 우리의 삶일 것이다.

 

내 안의 타자의 크기가 내 존재의 크기다. 모순과 갈등을 넘어 내 마음속의 다름을, 나의 타자를 나와 같은 것으로 바라보는 과정이 나의 삶이자 인격이고 나의 존재가 아닐까. 타자를 넘어 타자와 함께하는 삶, 타자의 다름을 다름으로 받아들이면서 나를 나로서 존재하게 하는 것, 그것이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라면 지나친 말일까.

 

귀신과 악마는 우리 안의 두려움과 악을 형상화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 타자와 함께 살고 있다. 타자를 비춰보는 거울은 나 자신의 생생한 얼굴이다. 타자 없는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그 타자는 나의 모든 것인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내 옆의 너일 수도 있으며, 미워하는 너이거나, 차라리 없었다면 인생이 참 황홀했을 것 같은 그런 너이기도 하다.

 

또 그 타자는 내 안의 낯선 어떤 존재인가 하면 내가 피하고 싶은 그 어떤 부분이기도 하다. 아니면 내가 꿈꾸는 어떤 존재,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그 누구일 수도 있다. 타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타자를 볼 수 있으면 한낮에도 내 안의 두려움과 귀신이 나타날 것이며, 타자를 보지 못하면 그 어떤 영혼의 존재도 없을 것이다. 죽음 이후는 완전한 침묵이나 허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죽은 자는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다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보지 못한다. 그러니 타자를 보지 못하는 자는 죽은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폭력에 대하여

 

폭력 현상은 한 사회의 모순과 갈등이 증폭되어 드러나며, 인간이 죽어간다는 처절한 속에서 나타난다. 폭력을 성찰하면 한 사회의 위기와 인간성이 말살되고 죽음에 이르는 원인을 감지할 수 있다. 폭력은 무조건 막는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다.

 

이를 금지하고 억압하여 악이 없어진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가 없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사회는 여태껏 존재한 적이 없다. 프랑스 철학자 퐁티는 폭력 문제를 인간의 존재적 조건과 연결 지어 논의한다.

 

그는 몸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에게 폭력은 숙명이라고까지 말한다. 폭력은 인간의 실존적 문제이지만, 인간으로서의 인간은 이 폭력을 어떻게든 극복하고 넘어서고자 한다.

 

기원전 17세기경 함무라비 법전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적 조항을 설정한다. 이 법은 오히려 폭력을 막기 위한 장치였다. 다시 말해 눈을 빼앗긴 사람이 살인으로써 복수하려는 폭력을 막기 위해 그저 복수는 눈에만 그쳐야 한다는 명령을 담고 있는 것이다.

 

폭력의 근원은 존재의 비존재화에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 서지 못하게 만드는 모든 생각과 말, 행동과 체제, 제도와 문화가 진정한 폭력의 원인이라는 뜻이다. 경제성장만을 향해 치닫는 사회의 문화는 폭력과 야만의 세계일뿐이다. 다른 사람의 권리와 생존권을 억압하면서 얻는 자신만의 이익과 영광은 폭력의 원인이 된다.

 

인간이 국가를 필요로 하는 것은 국가가 없는 무정부 상태에서의 혼란과 폭력을 막기 위한 조치에서 비롯되었다. 인간다움의 길은 폭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데서 비롯된다. 결여된 존재인 인간의 실존과 심연 깊은 곳에 자리한 모순에서 폭력은 비롯되지만, 이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폭력 문제를 해소할 길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차별받지 않고 공평한 대우를 바라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며,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정의의 개념은 공정함을 바라는 보편적 심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싫든 좋든 자본주의는 20세기 이래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정치경제 체제가 되었으며, 사화와 문화를 넘어 21세기 초엽인 이제는 인간의 정신과 삶, 마음까지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초기 자본주의와 수정 자본주의를 거쳐 신자유주의가 범람하는 이때는 인간의 삶이 이 체제를 떠나 살아갈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자본주의의 껍데기의 규범, 의사규범pseudo-norms을 극복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간의 인간다움이란 결코 가능하지 않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의 실존을 새로운 관점에서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란 존재는 근본적으로 무언가에 마음을 쓰는 염려의 존재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시간적이기에 죽음을 향해 죽음을 향해 간다는 사실을 벗어날 수 없는데, 이것이 바로 근본적으로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까닭이다.

 

인간은 자신이 죽음을 향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기획한다. 또한 인간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이해하기에 본성적으로 해석하는 존재다. 하이데거는 ‘결국 인간은 이 모든 사실을 넘어서려 하는 초월적 존재’란 사실을 강조한다. 즉, 사실적인 현재에 존재하지만 이 모두의 의미를 밝혀내려 할 뿐 아니라 이를 넘어서려는 초월적 특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의미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지닌 모든 관계가 단절되며, 인간 행동의 모든 가능성이 부서진다는 데 잇다.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라는 속담은 이런 마음을 드러내고 있지 않는가. 헤겔이 말했듯이 삶과 죽음은 자신의 존재를 위한 서로의 조건이다.

 

삶 없이 죽음은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있기에 삶이 존재한다. 죽었다가 돌아온 자도 없다. 절대적 무지, 절대적 단절과 절대적 무회귀성, 이 세 가지 절대성 때문에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 경악하게 된다. 예일대 철학교수인 케이건s.kagan은 <<죽음이란 무엇인가>>(2012)에서 죽음과 무관하게 남아 있는 인간의 어떤 정신적 영역이나 영혼 같은 부분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사후의 삶과 세계까지도 철저히 부정한다.

 

그는 죽음은 다만 인간 존재와 삶의 종말에 지나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은 절대 좋은 것이 아니기에 죽음에 맞서 가장 용감하게 살아가는 길은 죽음으로 끝나기 전의 삶을 철저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신의 불치의 병으로 죽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죽음을 맞는 심리적 단계를 거친다. 그 단계는 부정과 고립, 분노, 타협, 우울, 순응 등 다섯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죽음과 죽어감>>,2008).

 

하이데거는 그의 주저<<존재와 시간>>에서 “그 누구도 타인에게서 그의 죽음을 빼앗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좋은 삶이란 고통과 죽음이 없는 삶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깨닫게 될 때 삶은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그럴 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나에게서 나의 죽음을 성찰할 기회를 빼앗을 수는 없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인간을 고유한 나로 이끌어 간다. 포스터E.M.Forster 역시 이런 관점에서 “죽음은 인간을 파멸시킨다. 그러나 죽음과 마주하고, 죽음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삶으로서의 자각이 주어진다.

 

죽음을 자각하고 죽음을 현재에서 마주할 때 우리의 삶이 참으로 ‘인간’답게 자리한다는 뜻이다. ‘죽음을 성찰하고 거기서 죽음의 의미를 찾아 우리 삶을 성숙시키는 것이 인간의 인간됨’이란 사실이다.~

 

<‘철학, 인간을 답하다‘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신승환교수지음, 21세기북스출판> * 신승환교수 : 현재 카톨릭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카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독일 뮌헨대학교와 레겐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지금, 여기의 인문학>>,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성찰>>등 다수의 저서가 있음.

 

늘 바라보던 앞산이지만 흐리고 안개낀 날은 한없이 멀어 보인다~!
꽃속에 또 꽃이 피는 듯한 백일홍!
9월이 다가오니 꽃무릇도 피기 시작한다~!
참깨수확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간다~!
수확한 호박들!
일벌이 숫벌을 결국 죽게 만들었다. 숫벌은 여왕벌 산란을 위해 개체수가 얼마 안되지만 그 숫자마저도 벌통 안에서 밖으로 쫓겨나거나 죽게 된다.    
말벌 침입을 막기위해 문앞에 보초를 서고 있는 일벌들! 요즘은 하루 종일 횡대로 줄을 서서 날개짓과 머리를 좌우로 움직이며 주위를 살핀다!

일벌 두 세마리가 집요하게 숫벌(검은 몸통)을 쫓아낸다! 어쩔수 없이 운명적으로 태어났지만, 숫벌은 여왕벌을 가까이 하는 벌 외에는 새끼 키울 먹이꿀만 축내고 벌집 짓는 일도 하지 않으므로 결국 내몰리게 된다! 이렇게 밖으로 내몰린 숫벌은 결국 떠돌다 죽게 된다~! 꿀벌세계를 관찰해보면 생존경쟁이 치열하고 냉혹하다는 걸 느끼게 한다~!

 

'독서 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0) 2021.09.07
가족의 두 얼굴!  (0) 2021.09.03
루고네스의 시 감상  (0) 2021.08.27
홀스또메르!  (0) 2021.08.22
포퓰리즘의 부상!  (0) 2021.08.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