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순간은 완벽한 것이다.
정신이 청정함에서 만족이 생긴다.
만족이라 함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아무런 불평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평하지 않고 그냥 받아들일 뿐 아니라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이 순간은 완벽한 것이다.
마음이 이 순간을 벗어나지 않을 때,
다른 시간을 구하지 않을 때,
다른 장소를 구하지 않을 때,
다른 존재의 방식을 요구하지 않을 때,
구하는 마음을 놓을 때,
새들이 노래하는 것처럼,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별들이 춤추는 것처럼 지금 여기에서 기뻐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모든 것이요. 전체요 완벽함이다.
여기에 더 보텔 게 없다.
미래를 내려놓고 내일을 내려놓을 때 만족이 찾아온다.
‘지금’이 유일한 시간이요.
영원이 될 때 만족이 찾아온다.
-오쇼 라즈니쉬
7일간의 수행, 라즈니쉬의 깨달음
나 자신도 스승 없이 작업했다. 스승은 문이다. 예수는 끊임없이 말한다. “나는 문이요, 길이요, 진리이니 나를 따르라. 나를 통해 지나가라. 그대가 나를 통하지 않고는 도달하지 못하리라.” 그렇다. 때로는 스승 없이 작업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때 그 여행은 매우 위험하다.
일 년 동안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아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살아 있도록 유지하는 것만도 무척 힘든 일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식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도 나는 아무 갈증도 느끼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먹어야 했고 마셔야 했다.
육체는 존재하지 않은 것 같아서 나는 내가 아직도 육체 안에 있다는 것을 느끼기 위해 내 몸에 상처를 내야 했다. 오직 아플 때에만 나는 조금이나마 육체 안에 있었다. 매일 나는 5내지 8마일씩 달리곤 했다. 내가 존재하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하고만 있어야 했다.
“의사 선생님! 저를 도와주셔야 해요. 저는 틀림없이 미쳐가고 있어요. 아무것도 기억을 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어제 있었던 일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내가 초점을 되찾는 데는 일 년이 걸렸다. 그것은 하나의 기적이었다. 나는 뭔가를 했었다.
뭔지도 모르는 체 나는 문을 두드렸었고 이제 그 문이 열렸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명상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지 존재하기만 하는 그 공간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대는 하나의 현존으로, 주시자로 단지 거기 있을 뿐이다.
아니다 나는 그것을 행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단지 누워 있었고, 앉아 있었고, 걷고 있었다. 깊은 곳에서는 행위자가 없었다. 나는 모든 야망을 잃었다. 나는 단지 나 자신 속으로 던져졌다. 그것은 하나의 공(空)이었고 그 공은 사람을 미치게 한다.
그러나 공은 신에게로 가는 유일한 문이다. 그 말은 오직 미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만이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은 안 된다. 나는 여러 생을 통해서 깨달음을 위해 몸부림쳐왔다. 그러나 언제나 실패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본성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얻어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야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마음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돈, 권력과 명성을 원한다. 그리고 마침내 외적인 일들에 질리게 되면 마음은 깨달음을, 해탈을, 니르바나를, 신을 얻고자 한다.
그러나 똑 같은 욕망이 들어온 것뿐이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외부에 그 대상이 있었고 이제는 안에 있는 것이다. ‘내가 까달음을 얻은 날’ 이라는 말은 단순히 성취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까달은 날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모습 그대로 완전하다. 신은 결코 불완전한 것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리고 깨달은 사람들은 원한다 해도 언어를 만들어 낼 없었을 것이다. 깨달음은 침묵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어떻게 침묵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노자(老子)는 말한다. 진리가 말해지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진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언어는 사용되어야 한다.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그대의 죽음만 볼 수 있다면 나는 그대의 모든 전기를 쓸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한순간 속에 그대의 모든 전기를 쓸 수 있다. 그 한순간 속에 그대의 전 생애가 응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두쇠는 주먹을 꽉 쥐고 죽을 것이다.
아직도 붙잡고 집착하면서, 아직도 죽지 않으려 애쓰면서, 아직도 이완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사랑이 많은 사람은 손을 펴고, 나누면서 죽을 것이다. 그대는 그 얼굴에 모든 것이 쓰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사람이 완전히 의식적이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았는지, 아닌지. 만약 그런 삶을 살았다면 그때 그 얼굴에는 밝은 빛이 있을 것이다. 만약 정말로 내가 누구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그대는 나와 똑같이 절대적으로 비어 있어야 한다.
그때에는 두 거울이 서로 마주보고 있게 될 것이고 두 비어있음만이 비춰질 것이다. 서로 마주보고 있는 두 개의 거울…. 그러나 그대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대는 내 안에서 그대 자신의 생각을 볼 것이다.
그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다. 그대는 오직 이해할 수 있을뿐이다. 바로 그 이해 속에서 욕망은 멎는다. 기억하라 누구도 욕망을 멈출 수 없으며 실재는 오직 욕망이 멎었을 때에만 드러난다는 것을 ….
따라서 이것은 딜레마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욕망은 거기 있는데 붓다들은 계속해서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그들은 끊임없이 그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욕망은 이해되어야 한다. 그대는 욕망을 이해할 수 있고, 바로 그 욕망이 덧없음을 볼 수 있다. 직관이 필요하다. 즉각적인 통찰이 필요하다. 욕망이 멈춘 그날, 나는 완전한 희망 없음과 무력함을 느꼈다. 미래가 없었기에 희망도 없었다.
욕망은 줄곧 그대의 정면에서 어른거리며 게속해서 신기루를 창조한다. 그것은 땅 저편에 보이는 지평선과 같다. 그대가 쫓아가면 그것은 달아난다. 그대가 천천히 달려가면 그것은 천천히 달아난다. 그대는 지평선 사이의 거리를 한 치도 줄일 수 없다.
그대는 그대 자신과 지평선 사이에, 희망 사이에, 투영된 욕망 사이에 다리를 놓으려 한다. 욕망은 다리이다. 따라서 그대는 욕망을 향해 다리를 놓을 수 없다. 단지 다리에 대한 꿈을 꿀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무력했고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무언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대의 희망 없음 속에 유일한 희망이 있다. 그대의 욕망 없음 속에 그대의 유일한 충족이 있다. 존재는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그대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순간, 그대가 떨어져 나가는 순간, 그대가 사라지는 순간, 전 존재가 그대를 향해 들이닥친다.
희망이 부재했다. 나는 내가 절망하고 슬펐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나는 행복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7일 동안 나는 희망 없고 무력한 상태 속에서 살았다. 나는 매우 평온하고, 고요하고, 태연했으며, 중심 속에 있었다!~
깨어있는 의식으로 살아라
순간마다 일을 자각하며
깨어 있는 의식으로 살아라.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살아라.
위험을 감수하라.
그러면 그대는 주변에 전혀 다른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볼 것이다.
삶이 황홀해진다.
삶이 깊이와 의미를 갖기 시작한다.
취한 듯이 짜릿하고 황홀한 삶이 전개된다.
순간순간 살아갈 때
그대는 지식에 따라 살지 않는다.
지식은 과거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버리고 순간순간 살아갈 때,
매 순간 과거를 죽이면서 살아갈 때,
그대는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삶을 산다.
어린아이처럼 사는 것,
이것이 현자(賢者)의 삶이다.
예수는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는 한
신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한다.
지식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경이감이 넘치는 눈을 갖고 천진난만한 하게 살아야 한다.
항상 놀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삶은 놀라운 일로 가득하다!
이 놀랍고 경이로운 일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지식의 먼지가 그대의 눈을 가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사방에서 경이로운 일들이 일어난다.
삶은 기적이다.
어떻게 권태를 느낀단 말인가?
삶은 하나의 기적이다.
삶은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런 일로 가득하다.
-오쇼 라즈니쉬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김현국님 옮김 대일출판사>
* 오쇼 라즈니쉬 : 대학교수였으며 비종교인으로서 7일간의 수행 끝에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남달리 심취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