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뉴스를 믿을 수 있을까요?

[중산] 2019. 4. 16. 08:16


소크라테스, 플라톤,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촘스키, 허만에게 듣다!


한때는 ‘뉴스’가 단순히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전달해주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소셜미디어의 등장으로 우리는 정보 전달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감정을 조작하고 편견을 이용하려는, 선정적이고 출처가 의심스러운 이야기들을 점점 더 많이 접하고 있다. ‘탈진실’과 ‘대안적 사실’, 음모론과 ‘가짜뉴스’의 이 새로운 세상에서, 어떻게 우리는 진짜 진실을 구별해낼 수 있을까? 하지만 사실, 이것들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플라톤과 최초의 ‘탈진실인들’

사랑하는 스승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플라톤은 스승의 명성을 변호하고 그의 싸움을 이어나가는 일에 착수했다. 그 목표는 주로 스승의 추락에 기여했을지도 모르는 ‘수사학이 타락시킨 철학’이었다.

플라톤은 여기서 잘못은 ‘소피스트’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소피스트는 수사학 기술을 가르치는 프리랜서 교사들이다. 소피스트들 가운데 한 명인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유명한 선언을 남겼다. 추측건대 인간의 주관성과 별개로 존재하는 가치나 진실은 없다는 뜻일 것이다.  

동료 소피스트 고르기아스도 그와 비슷하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니 소피스트는 최초의 ‘탈진실인’이었다.



프로파간다(propaganda)에서 가짜뉴스까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프로파간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미국 공군은 독일과 일본의 도시와 마을에 60억 장 가량의 전단을 뿌린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다른 무엇보다 허위정보를 퍼트리고 항복을 독려하고 사기를 떨어트리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가짜 노스트라다무스 예언을 유포할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2016년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추가된 단어 ‘탈진실’은 ‘객관적 사실이 감정에 대한 호소나 개인적인 믿음보다 여론 형성에 영향을 덜 미치는 경우’라고 정의되어 있다. 이것이 프로파간다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전통적인 프로파간다와 현재의 ‘가짜뉴스’의 차이는 아마도 인터넷과 소셜미디어, 그리고 그것들이 지니는 더 큰 영향력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인터넷은 더 광범위한 정보와 펙트체크를 하기 위한 자료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등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그러나 많은 정치 평론가들은 여론을 오도하는 가짜뉴스 기사들이 프랑스, 미국, 영국의 최근 선거에서, 어쩌면 다른 곳에서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글을 비롯해 그런 기사를 확산시키는 매체들이 이런 흐름과의 싸움에 동참하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들에게도 분명 큰 책임이 있다. 검색 결과의 ‘순위’는 구글이 정한다. 페이스북도 마찬가지다. 당신의 페이스북 피드는 단순히 당신의 친구들이 공유하는 것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무엇이 인기 있는지, 당신이 좋아할 만한 것은 무엇인지 페이스 북 알고리즘이 걸러내 ‘편집’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정보를 볼지 걸러내고 조절하는 그런 서비스들이 갖는 엄청난 잠재력은 정치 과정에 우려스러운 위협이 된다. 특히 극단적인 생각이나 반민주적 동기를 가진 이들, 심지어는 대립관계에 있는 나라들이 그것을 악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의 조작하기

주류 매체는 그런 의식적 조작에 참여할 리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파든 좌피든, 대중주의적이든 엘레트주의적이든, 모든 신문과 TV 뉴스는 편견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노암 촘스키와 에드워드S.허만은 언론 매체의 ‘프로파간다 모델’이라는 것을 제시하며 이런 전통작인 생각에 의문을 제기한다. 여기서 그들은 주류 언론이 사실은 자유롭지 않으며, 기득권(그 나라의 정치 계급, 군대, 공공기관, 유럭 기업, 기타 기득권 층)의 생각을 퍼트린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모두 다음 다섯 가지의 필터를 사용해 뉴스를 어느 정도 간접적으로 조절했다.


(1). 지분: 대부분의 뉴스 매체는 특정한 사업적 이해관계를 가진 대기업 소유다. 그들에게 진실은 두 번째 문제다.

(2). 광고: 광고주는 광고를 빼겠다는 위협으로 뉴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3). 정보원 통제: 정부와 기타 대형기관들은 정보를 조작할 수 있으며, ‘비친화적’ 언론이 정보원(중요자료와 정책 프로그램에 관한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제한 할 수 있다.

(4). 비난 공세: 기관들은 반론, 정치연설, 항의 고소등을 통해 ‘부정적인’뉴스를 공격할 수 있다.

(5). 두려움: 실존하거나 가공된 공동의 적이 안고 있는 위험은 두려움을 통해 의견을 통일하고 비판을 비애국적이라고 몰아붙이는데 이용될 수 있다.


따라서 뉴스는 직접적인 강요나 명백한 검열 없이도 가장 중요한 지점을 명중시킬 때 효과적으로 간접 조작할 수 있다. 바로 이익이다. 광고주를 잃고 정보원에 접근이 제한되고, 고소의 대상이 되는 등 신문은 판매가 감소하고 수입을 잃을 위험에 처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촘스키와 허만은 정치민주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결정하기

뉴스와 프로파간다의 차이는 우리가 바라는 만큼 분명하지 않다. 비관주의자들과 소피스트, 포스트모던주의자들은 진실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지만 우리는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모든 관점에 편향성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는 뉴스 기사를 분석하는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출처가 어딘지, 오프라인에도 나오는지, 얼마나 균형 잡혀 있으며 잘 쓰였는지 등 하지만 만약 주류 매체가 프로파간다의 도구(어느 정도)라면,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확인 할 수 있을까? 촘스키의 답변처럼, 뉴스를 쓰는 건 개인들이므로 노골적으로 프로파간다의 도구 노릇을 하는 주류 매체들 속에서도, 당신은 여전히 진실하고 상대적으로 덜 편향적인 보도를 발견할 수 있다. 그저 잘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마르크스라면 어떻게 할까’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게러스 사우스웰 지음,강성희님 옮김,시그마 북스 출판>

* 게러스 사우스웰 박사: 철학자이자 작가, 삽화가로 영국웨일스에서 살고 있다. 오랜 세월 철학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저서를 냈다. 


                                                                                                          유채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