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인간
모든 인간은 늘 두 개의 현실과 씨름해야 한다. 외부세계와 내면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내면세계의 중심에서 스스로를 ‘나’라 부르는 그 사람은 균형 상태에 머무르면서 안장을 꼭 붙잡고 앉아 있으려고 한다. 당신은 멀리 찾아 나설 필요도 없다. 당신을 둘러싼 주변 곳곳에서 ‘나’를 찾을 수 있다.
매 순간 안장에서 떨어지고 있는 ‘나’를, 심지어 우울한 상태로까지 추락하고 있는 ‘나’를, 혹은 트램폴린 위에 있는 것처럼 우울한 상태로 저 아래 가라앉았다가 다시 저 높이 치솟는 ‘나’를 말이다. 이 마지막의 ‘나’는 거의 규칙적으로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가 다시 새로운 시작과 함께 스스로를 훌쩍 넘어 저기 위로 올라간다. 정신병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조울증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줬다. 학계조사에 따르면, 사람들의 약 3분의 1이 되풀이 되는 이런 심한 감정 기복 속에서 인생을 보내고 있다.
정상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당신은 한번쯤 생각해 봤는가? 무엇이 정상인지를 설명하려고 하기보다는, 부적절하거나 사리에 어긋나는 행동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가령 사람들은 시력이 감소하는 건 정상적인 노화현상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누군가 장님이 되는 것도 정상적일까? 당연히 아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다른 직원들을 착취하는 영리한 상인은 정상일까? 이 사람의 인간성이 부족해서, 사람들이 이 사람을 가리켜 비정상적이고 냉혹한 이윤 추구가라고 말을 하는데도? 그렇다면 이 사람은 공감 능력과 명예심과 공정함과 수치심이 없는 그런 ‘무정한 정신질환자’와 동일시 할 수 있다.
솔직하지 않으면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는 이익을 볼 수가 있어서, 또는 솔직하면 피해를 볼 수가 있어서, 그래서 더 이상 솔직하게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을 당신은 분명히 아주 많이 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호간 또는 제3자에 대한 솔직하지 못한 이러한 태도는 부모는 물론이고 배우자로부터 정상적인 행동으로 판단되지 않는다.
정상성은 사람의 행동이 얼마나 진실 된지, 얼마나 참된지, 얼마나 실제에 충실한지에 따라 판가름 된다. 우리는 행동에 대해서 그것이 정상적이라고 판단하거나, 아니면 어떤 사람의 행동이 이상적이면서 상황에 적절할 경우에는 그 사람이 ‘매우 정상적’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당신이 정상적으로 행동하고 또 외부의 현실에 상응해서 적절하게 행동할 수 있으려면, 당신에게 반드시 척도, 즉 당신에게 방향 설정을 해줄 수 있는 일정한 기준이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지침이 바로 도덕적 이상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내가 쓴 <우리 안의 조화 법칙>에서 여섯 가지 윤리적 규범으로서 처음으로 논리적인 근거를 제시해 놓았는데, 관용, 책임, 성실, 개방성, 호의, 그리고 정의가 바로 그것이다.
이상이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상태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이 아니라 이상은 길을 가르쳐주는 이정표이다. 이상은 기준규범으로서, 당신이 올바르게 판단하고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도록 당신에게 방향을 제시해 준다.
정상적이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모든 신체적 및 기술적 영역에 있어서는 뭔가가 평균에 상응하는 것을 정상적이라고 한다. 정신적 가치, 윤리적인 이상에 관한 것일 때에는 정상적이라고 하는 것은 ‘규범’을 뜻한다. 같은 인간에 대한 정직과 성실은 언제나 이상이고 지침이며, 정상적인 인간은 이를 지향해서 언어와 태도를 선택한다.
심리평가와 상담의 기준이 되는 정상성은 정신의 이상적 규범만을 토대로 측정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성인에게 스스로를 보살피고 맡은 바 업무를 완수해 내기 위한 이상이 없다면, 이 성인 역시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안의 법칙’을 극단적으로 억누르면서 모든 윤리적 행동을 무시하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특히 상습범이 되는 중범자가 이러한 예에 해당하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어린애 같은 인간
정상적이지 않은 일은 너무나도 자주 발생한다. 웃기지도 않는 최신 유행품들의 소유,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엄청난 배기량을 자랑하는 요란한 자동차 같은 것으로 인한 무의미한 우월감, 무엇보다 사업적인 성공, 혹은 온갖 직함으로 꽉 찬 명함,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은 엄청난 소유물 등 그 의미가 과대평가된 외적인 성공을 토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랑스러워하면서 이른바 ‘행복해’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외적인 사건, 성공 그리고 불행이 자기평가와 내면세계의 상태에 기준이 된다고 착각하고 있다. 어린아이를 생각하면 이걸 잘 이해할 수가 있다. 어린아이는 자기 자신과 자기의 내면세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어린아이의 ‘나’ 의식은 내면세계로서 형성이 아예 안 되어 있다.
어린아이는 ‘나’형태로 생각하고 말할 능력조차 없다. 그러나 유아기의 순진무구한 상태는 늦어도 사춘기를 지나면서 달라진다. 이제는 외부의 사건과 내면의 자기감정이 두 개의 분리된 세상이라는 것을 배워서 알고 있어야 한다. 정의로운 신이 대체 왜 바다를 갈라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익사시켰는지. 신이 왜 지진을 일으켜 수만 명의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과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 모두를 매몰시켰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는 새로운 믿음을 갖게 된다면, 마술이나 자연과학, 기술 또는 물질적인 이익 같은 것을 믿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외부의 현실을 축복 받는 유일한 현실이라고 여긴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럼 우리는 스스로 병들게 만들 것이다.
짧은 생각으로 우리가 눈에 두드러지는 외부의 물리적 현실을 내면의 정신적, 심리적인 현실과 혼동한다면, 우리는 핸들 없이 자동차를 운전하는 사람과 똑 같이 된다. 당신은 신이 죽었다고 선언할 수 있지만, 내면의 현실, 이 안쪽 원의 현실은 매 순간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
개인심리학을 창시한 알프레드 아들러는 매우 현명한 사람으로, 딱 한 가지 점에서 오해를 했다. 즉 열등감이 ‘인체 장기의 열등감’에 의해 유발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마추어 심리학에서는 신체적인 결점(조그맣거나 아름답지 못한 신체적인 발달, 여성의 작은 가슴, 대머리, 삐걱거리는 나무 의족 등)이나 물질적 이익의 결여가 정신적 결함, 불만족 또는 우울증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는 대다수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남들에 대해서도 내면세계는 외부세계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릇된 인과성, 그릇된 주장, 그릇된 해석이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 그릇된 사고 오류이다.
특히 자살하는 청소년들이나 성범죄자들의 범행 동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납득할 만한 이유를 외부의 현실 속에서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들의 회의나 비정상성의 원인은 본 궤도에서 이탈한, 충돌적인 자기감정에 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동일한 환경 속에서 동일한 교육을 받았지만 흔히 완전히 다른 성격과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는 자녀들을 보면, 자기평가가 바로 각 개인의 각별한 인격적 특성의 원인이라는 인식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내적인 원인에 대한 무지, 즉 다양한 형태의 자기과대평가와 자기과소평가에 대한 무지는 피상적이고 그릇된 인과관계를 낳게 된다.
당신이 당신의 자기감정에 대한 원인을 더 이상 외부 세계에서 찾지 않고, 이제는 당신의 자기감정에 대해 스스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됐다면, 그렇다면 충분하다. <‘4색 인간’에서 극히 일부 발췌, 막스 뤼셔 지음, 김세나님 옮김, 오르비스출판>
* 막스 뤼셔 박사 : 스위스 심리치료사, 스위스 바젤에서 철학, 심리학, 임상 정신의학을 전공했다. ‘임상 뤼셔 색채진단법’은 오늘날 대학교에서 7개국 언어로 강의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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