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ㅇ)과 이데올로기(x)
알베르 까뮈는 '자기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의 특징을 ‘모든 질문들 중에 가장 시급한 질문’이라고 규정한다. 길잡이가 되는 이상들은 당신과 자기 삶의 의미를 질문하고, 충만한 인생을 꾸려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필수적이다. 그래서 이상은 방향규범이다.
이는 내면의 길잡이로서 한 인간이 자기실현을 원할 때, 그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상은 인간이 도달해야 하는 ‘목표’가 아니라, 그 방향을 지시하는 방향계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이 이러한 내면의 이상에 따라 모순되지 않게 살아갈수록, 당신은 더 진정으로 자연스러운 인간이 되고, 우리 사회의 평균적 인간과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평균적 인간은 평균이하로 행동한다. 우리는 이를 납득해야 한다. 다수의 사람이 부자연스럽고, 과민한 역할을 수행하거나 스스로의 억압 속에 갇혀 있다. 평균적 인간은 서로를 스쳐지나가며 산다. 대중은 주류적인 흐름 속에서 표류한다. ‘삶의 의미’란 삶의 모든 가능성들을 아우르는 본질적 완전성에 관한 문제이므로, 모든 절대화되고 일방향적인 이상, 즉 모든 이데올로기는 이치에 어긋난다고 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가 주장하는 어불성설은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각각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다른 윤리적인 이상, 특히 관용이라는 이상을 부정하고, 그와 투쟁을 벌인다. 이데올로기는 다양하게 분열된 현실을 자신의 절대적, 일방향적 이상으로 환원시키기 때문에 편협성이 모든 이데올로기들의 본질에 속하게 된다. 한 이데올로기의 추종자는 자신의 원칙을 가지고 중요한 과제와 문제들을 전부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관용, 개방성, 정직, 친절과 같은 이상들을 경시한다. 이데올로기들, 그리고 종종 명칭이 ‘- 주의’로 끝나는 방향성들, 예를 들면 근본주의, 파쇼주의, 인종주의 그리고 각종 예술적, 학술적 ‘-주의들’ 은 따라서 관용적이지 못하다. 특히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종교적 이데올로기들은 자신의 권리 주장을 통해 대개 생존에 적대적이고 파괴적이다.
청년은 삶의 의미를 묻고 그 답을 찾으려 한다. 그들이 이상을 찾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종종 이데올로기에 속곤 한다. 예컨대 다수의 정치적 또는 종교적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처럼, 청년기에 가짜 이상에 매달렸다가 나중에 그에 실망하거나 속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러한 소위 이상 및 이상주의를 바닥에 내팽개쳐 버린다.
이런 사람들은 그때부터 자기 자신을 ‘이상적인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또 다른 하나의 이데올로기, 허무주의적 리얼리즘에 빠지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이상에 대한 방향규범 없이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 역시 꼴불견이긴 마찬가지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상을 갖는다거나 이상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우스꽝스럽고 순진한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이러한 환멸주의자들은 그들이 과거에 진정한 내면의 이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만 쫓았다는 서실을 결코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4색 인간’에서 극히 일부 발췌, 막스 뤼셔 지음, 김세나님 옮김, 오르비스출판>
* 막스 뤼셔 박사 : 스위스 심리치료사, 스위스 바젤에서 철학, 심리학, 임상 정신의학을 전공했다. ‘임상 뤼셔 색채진단법’은 오늘날 대학교에서 7개국 언어로 강의되고 있다.
모든 대립을 해소하는 방법
부부의 의견이 대립했을 때, 두 사람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절충안을 찾을 수 있다면 그 보다 좋은 건 없을 것이다. 아내는 휴일에 해산물을 즐기러 부산에 가고 싶다고 말하고, 남편을 스키를 탈 수 있는 무주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면, 양쪽이 즐길 수 있는 강원도에 가는 해결책을 생각해낼 수 있다. 이처럼 대립으로 인해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 헤겔의 변증법이다.
아내의 의견이 ‘정립定立’, 남편의 의견이 ‘반정립反定立’, 강원도는 ‘종합綜合’에 해당한다. ‘종합’은 두 사람의 중점(식사와 스키)만을 남기고 불필요한 요소(부산, 무주)를 버린 후 더 상위 차원을 모색하는 조작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이 조작이 ‘止揚, Aufheben' 이다.
변증법은 철학적으로 아주 강력한 수단이다. 과거의 철학자를 보면 플라톤의 이상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 혹은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등 대립이 따르기 마련이었다. 그 외 철학자의 이론은 대립하는 어느 한쪽 편을 받아들이면서 완전히 새로운 통일된 전체를 낳았다. 이러한 생성운동이 헤겔의 철학이었다.
헤겔의 저서<<정신현상학>>을 보면 ‘지금∙여기’와 물체, 자연법칙과 지성 등의 정립, 반정립이 차례차례로 지양되어 결국에는 ‘절대정신’에 이르게 된다. 절대정신이란 정신의 가장 완성된 형태로서 예술, 종교, 철학에서 스스로를 드러낸다.
처음에는 개인의 감각, 의식, 지성 등의 형태를 갖는 주관적 정신으로 나타났다가 사회화와 객관화 과정을 거쳐 법, 도덕, 정의 등을 지니는 객관적 정신으로 나타난다. 이후 이 객관적 영역에서 주관과 객관에서의 유한성을 지양하면 자기와의 전적인 동일성을 자각하는 정신, 즉 절대적 정신이 된다.
피히테의 주관적 관념론,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의 대립을 지양한 종합적 관념론이라고 할 수 있다. <‘30분 철학’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누키 시게토 지음, 전경아님 옮김, 길벗출판> * 누키 시게토 : 도쿄대학교 철학과 졸업, 도호쿠대학교 박사, 현재 센슈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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