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속의 죽음
저녁 6시에 나는 프라하에 도착했다. 짐을 곧 역의 수화물 보관소에다 맡겼다. 이제는 두 개의 트렁크가 팔에 매달리지 않아서 나는 이상한 해방감에 부풀어 있었다. 내게는 가진 돈이 별로 없었다. 엿새 정도 지탱할 수 있는 돈이었다. 그 후에는 내게 사람이 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그 문제에 관해서도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수수한 호텔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둑으로 막아 물살이 소용돌이치는 블타바 강을 따라서 방황했다. 인기척이 없고 고요한 흐라드신의 넓은 구역에서 기나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해가 서산으로 기우는 시간이면, 그 구역의 대사원과 궁전들의 그늘에서 쓸쓸한 나의 발걸음 소리가 길거리에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 소리가 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공포감이 다시 나를 사로잡곤 하였다. 나는 일찍 밥을 먹고 8시 반이면 자리에 눕곤 했다. 태양이 떠 있는 동안에는 자신으로부터 딴 데로 생각을 돌릴 수 있었다. 교회, 궁전, 박물관 같은 모든 예술작품 속에서 나는 나의 고뇌를 진정시켜보려고 했다. 그런 상투적인 수단으로 나의 반항을 우울로 녹여 없애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나는 이방인이었다.
내가 간판을 읽을 수도 없는 도시, 친근감을 주는 아무것도 깃들여 있지 않은 이상한 문자들, 이야기를 나눌 친구도 없으며 심심풀이도 없다. 낯선 도시의 소음이 들려오는 이 방으로부터 나를 끌어내어 어떤 집이나 어느 정든 곳의 다사로운 빛으로 데려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여행은 인간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하나의 커다란 부조화가 그와 사물들 사이에 생겨난다. 전보다 덜 단단해진 그 마음속으로 세계의 음악이 더 쉽게 흘러든다. 그렇기에 그 커다란 헐벗음 속에서는, 덩그러니 서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한 그루 나무일지라도 가장 부드럽고 가장 진귀한 이미지가 될 수 있다.
예술 작품과 여인의 미소, 저희 땅속에 뿌리박은 인종, 수세기의 과거가 요약되어 있는 고적들, 그것은 여행이 마련해주는 감동적이고도 생생한 풍경이다. 그리고 하루가 끝나면 다시금 영혼의 굶주림처럼 무엇인가가 내 마음속에 깊은 공허를 만들어 놓는 호텔 방. 호텔의 문턱을 넘어서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그 불안을 더욱 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나는 프라하를 떠났다. 나는 빈에 도착하여 일주일 만에 다시 출발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 자신에게 사로잡힌 포로와도 같았다. 그러나 빈에서 베네치아로 나를 싣고 가는 기차 속에서 나는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야 알겠다. - 나는 행복을 맞아들일 준비를 갖춘 것이다.
나는 다만, 비첸차 근방의 어느 언덕 위에서 보낸 엿새 동안에 관해서만 이야기하련다. 아직도 나는 거기에 있는 듯하다. 아니, 차라리 거기로 돌아가 있는 나를 가끔 발견한다. 그리하여 로즈마리 향기 속에서 나는 모든 것을 도로 찾았다는 느낌을 받곤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탈리아로 들어간다.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올리브나무, 먼지가 뽀얗게 앉은 무화과나무다.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들의 아늑히 그늘진 광장들, 비둘기들이 쉴 곳을 찾는 정오 무렵, 완만한 나태, 영혼은 거기서 저의 반항을 누그러뜨린다. 정열은 차츰차츰 눈물로 변해간다. 그리고 마침내 비첸차에 닿은 것이다.
여기서는, 암탉의 울음소리로 흐뭇하게 부푼 아침으로부터 달콤하고 부드러운 저녁, 사이프러스나무들 너머로 비단처럼 보드랍고 이따금씩 길게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그 비길 데 없는 저녁때에 이르기까지, 하루하루가 제자리걸음으로 돌아간다.
나를 따라다니는 이 내면의 정적은 하루를 다른 하루로 이어가는 느린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생겨난다. 고풍스런 가구가 있고 손으로 뜬 레이스가 늘어져 있으며 벌판을 향해 문이 열린 이 방 이외에 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얼굴 위로는 온 하늘이 다가든다.
이 하루하루의 회전, 그것을 나는 움직이지 않은 채 나날과 더불어 돌아가며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나에게 가능한 유일한 행복을 - 주의 깊고 정다운 의식을 호흡한다. 나는 하루 종일 거닐며 언덕에서 비첸차 쪽으로 내려가거나 들판 쪽으로 더 멀리 나간다.
만나는 사람마다, 길거리의 냄새마다 나에게는 무한한 사랑의 구실이 된다. 과일을 늘어놓은 노점들, 까만 씨가 박힌 수박들이며 투명하고 즙이 끈끈한 포도들 - 더 이상 고독하게 있을 줄 모르게 된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의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날카로우면서도 부드러운 피리 소리 같은 매미의 소리, 9월의 밤에 만나는 물과 별의 향기, 유향수(乳香樹)들과 갈대들 사이의 향기 그윽한 길들, 그런 모든 것들이 고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사람들에게는 사랑의 표시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루가 지나간다. 태양으로 가득 찬 시간의 황홀함이 지나 간 뒤에는 서쪽에 비끼는 황금빛과 사이프러스의 검은빛이 만들어놓는 찬란한 배경 속에 저녁이 찾아온다.
벌써 첫 별이 뜨고, 맞은쪽 언덕에 세 개의 불이 켜지며 아무 예고도 없이 갑자기 밤의 장막이 내려, 등 뒤의 덤불 속에서는 살랑거리는 소리와 더불어 불어오고 있으니, 낮은 나에게 그 다사로움을 남긴 채 사라져버린 것이다. 물론 나에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이제는 더 이상 고독하지 않게 된 것뿐이다. 프라하에서 나는 벽돌 사이에 갇혀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여기서는 세계를 내 눈 앞에 두고 있었다. 내 주위 곳곳에 투영된 나는 나를 닮은 모습들로 이 우주 전체를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그 빈곤의 세계에 대한 나의 애착과 사랑을 이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나는 이제야 비로소 태양과 내가 태어난 고장이 주는 교훈을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고장은 나를 나 자신의 중심으로 이끌어가는, 은밀한 나의 고뇌와 대면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프라하의 고뇌였으며 동시에 그것이 아니기도 했다. 어떻게 그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사실 나무들과 태양과 미소가 가득한 이탈리아의 벌판 앞에서 나는 한 달 전부터 나를 따라다니던 죽음과 비인간적인 것의 냄새를 다른 곳에서보다 더 절실하게 포착할 수 있었다.
그렇다. 눈물 없는 그 충만 함, 나를 가득히 채워주던 그 기쁨 없는 평화, 그 모든 것들은 오로지 나에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 즉 어떤 체념과 무관심에 대한 뚜렷한 의식에서 오는 것이었다.
삶에의 사랑
나는 아직도 낮에 받은 햇빛으로 어지러움을 느끼며 흰 교회당들, 석회로 바른 벽들, 메마른 들판과 무성한 올리브나무들로 머릿속이 가득한 채 자리에 걸터앉았다. 나는 달콤한 편도즙을 마시면서 내 맞은편에 보이는 언덕의 곡선에 눈길을 던지고 있었다.
저녁은 초록빛을 띠어가고, 가장 높은 구릉 위에서는 하루의 마지막 미풍이 어떤 풍차의 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러자, 자연의 기적에 의하여 모두들 목소리를 낮추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늘과, 그 하늘을 향하여 떠오르는 노래하는 듯한 말소리들밖에는 이미 아무것도 없었고, 그 말소리도 매우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짧은 황혼의 한순간 속에는 덧없고도 우수에 잠긴 그 무엇, 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한 고장의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감지되는 그 무엇이 감돌고 있었다. 울고 싶어질 때가 있듯이, 나는 사랑의 충동을 느끼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내가 잠을 자며 보내는 시간의 순간순간은 모두 삶의 가운데서...즉 대상이 없는 욕망의 시간 가운데서 도둑질을 당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팔마의 카바레와 성 프란체스코 승원에서 경험한 저 열광적인 시간에서처럼, 나는 내 두 손 안에 세계를 움켜잡아보고 싶던 저 걷잡을 수 없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 채 긴장되어 자리에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내 생각은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부과해야 할 한계들이 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야만 창조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것에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
오늘은 잠시 활동을 정지하고, 나의 마음은 제 자신을 맞으러 간다. 아직도 불안으로 내 가슴이 조여드는 것은 잡히지 않은 이 순간이 내 손가락 사이로 마치 수은 방울처럼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내가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계에 등을 돌리는 사람들은 내버려두자. 나에게는 불만이 없다. 왜냐하면 내가 태어나는 것을 나는 바라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각 나의 왕국은 송두리째 이 세계의 것이다. 이 태양과 그늘들, 이 열기와, 대기 속에서 느끼는 이 싸늘함....하늘이 나의 연민에 화답하여 그 충만함을 보여주고 있는 이 창가에 모든 것이 다 쓰여 있는데, 무엇이 다 죽어가고 있는지 어떤지, 그리고 사람들이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는지 어떤지 자문해볼 것인가?
중요한 것은 진실해지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 즉 인간적인 것도 단순함도 거기에 다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곧 세계일 때보다도 더 진실해지는 때가 과연 언제이겠는가? 나는 갈망하기도 전에 만족되었다. 영원히 눈앞에 있는데, 나는 그것을 바랐던 것이다. 이제 내가 바라는 것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명철한 의식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한 사람은 관조하고 또 한 사람은 자기의 무덤을 판다. 어떻게 그들을 서로 분리시켜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여기 미소 짓는 하늘이 있다. 햇빛이 부풀어 오른다. 곧 여름이 되려는가? 그러나 사랑해야할 사람들의 눈과 목소리가 여기 있다. 나는 나의 모든 몸짓을 통해서 세계에 연결되어 있으며 나의 모든 연민과 감사를 통해서 인간들에게 연결되어 있다.
세계의 안[裏面]과 저 겉[表面] 중에서 나는 어느 한쪽을 선택하고 싶지도 않고 또 남이 선택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남이 명철하고 아이로니컬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착하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오.”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 두 가지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다는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어떤 이를 가리켜 그는 배덕자라고 말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는 어떤 윤리관을 세워 가질 필요가 있다는 뜻으로 새겨듣고, 또 어떤 사람을 놓고 지성을 멸시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그가 자기 마음속에 일어나는 회의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사람들이 속임수를 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큰 용기란 빛을 향하여서도 죽음을 향하여서도 두 눈을 똑 바로 뜨고 직시하는 일이다. 게다가 삶에 대한 이 치열한 사랑으로부터 이 은밀한 절망으로 인도하는 연계를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사물들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아이러니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그것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조그맣고 맑은 눈을 깜박이며 그 아이러니는 “마치 어떠어떠한 것처럼 살도록 하시오.” 하고 말하는 것이다. 많은 탐구에도 불구하고 나의 지식은 이 정도에 그친다.~
<‘안과 겉’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님 옮김, 책세상 출판>
* 알베르 카뮈 : 1913 알제리 생. 1957년도 노벨문학상 받음,<이방인>,<안과 겉><시지프의 신화>,<페스트>,<반항하는 인간>등이 있다.
* * 오래 전에 주마간산격으로 유럽여행을 하였다. 카뮈의 ‘안과 겉’을 접하면서 유럽의 지형을 다시 펼쳐보고 글의 의미를 되새겨보았다. 알베르 까뮈의 『안과 겉』은 까뮈가 22세에 쓴 에세이집이다. 그는 이 책을 집필하면서 철학 학사 과정을 마친다. 그 당시의 풍경과는 차이가 많이 나겠지만 작품속 배경과 의미를 음미하는 데는 도움이 될 듯 하여 사진을 올려봤다~!!<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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