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댓국집
늑골이 시릴 정도로 쓸쓸한 날은 혼자 술을 마십니다. 부를 만한 친구가 없어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제 심경을 설명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고 싶어서입니다. 따지고 보면 외롭지 않은 존재가 어디 있을까요. 그러니 혼자 고통을 지고 가는 양 마주앉은 사람을 무겁게 할 필요는 없지요.
혼자 마시는 술맛도 환경이 어느 정도 맞아야 완결성을 갖습니다. 먼저 주변이 너무 번잡하지 않아야 합니다. 또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야 하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조건을 따지다 보니 결국 ‘장사가 잘 안 되는 집’을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집은 장사가 잘 될 조건은 단 하나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위치부터 후미진 곳입니다. 더구나 주인이 친절한 것도 아닙니다. 늙수그레한 부부가 서빙과 주방을 교대로 맡는데, 특히 아저씨는 친절이란 놈과 원수를 맺은 것 같습니다.
손님이 오면 대충 차려 놓고 얼른 자기 자리로 갑니다. 그나마 그동안에도 눈이 TV에 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손님보다는 파리가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엊그제는, 상황이 더 나빴습니다. 안주로 하기에 가장 만만한 순대정식을 달라고 했더니 아저씨 얼굴에 난색이 그려집니다.
“오늘은 정식이 안 됩니다.”
‘어? 그래요? 그럼 순댓국 한 그릇 주세요.“
“그게∙∙∙ 오늘은 그것도 안 됩니다. 순대를 못 삶았거든요.”
“그래요? 그럼 뭘 먹을까요?”
“뼈 해장국 드세요. 오늘은 그것만 돼요. 아! 오징어볶음도 있긴 한데∙∙∙.”
“그럼 뼈해장국 주세요. 막걸리 한 병하고요.”
주인이 돌아가고 난 뒤 가만히 생각해보니 기가 막힌 일입니다. 순댓집에 순대가 없다니, 그것도 못 삶아서 없다니. 장사를 하겠다는 건지, 아예 문을 닫겠다는 건지.그래도 주인은 꿋꿋하게 TV에 박혀 있습니다. 양파를 더 달라고 하고 싶은데 TV삼매경을 방해할까 봐 말을 꺼내기도 힘듭니다.
골목은 제법 흥청거리는데 이 집은 빈자리를 자랑합니다. 모처럼 젊은 여인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괜히 제가 불안해집니다. 제가 주문할 때와 똑 같은 상황이 반복됩니다. 그들 역시 마지못해 원하지 않는 음식을 먹습니다. 한숨이 절로 터집니다.
밥을 다 먹고 카드 내기가 미안해서(현금이 있어야 순대라도 사오지 않을까 싶어서) 현금을 냈더니, 거스름 돈 천 원 한 장이 없어서 쩔쩔맵니다.
누구는 제게 그런 집으로 왜 가느냐고 타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또 그 집으로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 술 마시기 좋아서만은 아닙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들에게는 순댓국집이 마지막 생존수단인 것 같아서입니다. 그마저 문을 닫으면 길거리로 나앉는 게 아닌지 은근히 걱정됩니다.
그러니 살아남아야 합니다. 물론 무엇보다도 앞서야 할 건, 주인 스스로 회생하려는 의지와 노력이겠지요. 그것이 없으면 백약이 무효일 수밖에 없습니다. 좀 더 부지런을 떨고 좀 더 친절해져야겠지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단순한 경구만은 아니니까요.
그 무엇도 ‘망하지 않는’ 세상을 꿈꿉니다. 이뤄질 수 없는 것처럼 보여도, 놓지 않고 꿈꾸다 보면 조금이라도 근접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꿈조차 꾸지 않으면 꽃조차 피지 않는 세상이 올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에 자주 시달립니다.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에서 극히 일부 발췌, 이호준지음, 마음의숲출판>* 이호준 :지난10년 간 사강이란 필명으로 에세이와 칼럼을 썼으며,<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1·2>,<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등을 저술 시인이자 여행작가로 활동과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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