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
내 그를 미워하기로
제대로 고집 센 그가
손톱만치나 고치랴
타고난 제버릇을!
내 그를 미워함이
힘없고 보람 없기
새로운 ‘체’막음 같고
꿈속 팔짓 같구나
사랑이 빛 없음 같이
미움 따라 갚을 진대
내 숨결 끊이기까지
내 그를 미워하리라
변영로의 <미움>이라는 시에서 미움의 독특한 기능에 관해 노래하고 있다. 상대방을 미워하는 것은 ‘고집 센’ 그의 못된 버릇을 고치기 위함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의 미움은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고 ‘꿈속 팔짓’처럼 ‘힘없고 보람 없기’만 하다. ‘사랑이 빛 없음 같이’라는 탄식에서 나의 미움은 또 다른 사랑의 표현, 상한 마음의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 숨결 끊이기까지 내 그를 미워하리라’는 말은 그가 변화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역설적인 표현인 셈이다.
첫 고백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 년이 넘게 군사독재 속에 지내오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증오하다보니
사람 꼴도 말이 아니고
이제 나 자신도 미워져서
무엇보다 그것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신부님 앞에 가서 고백했더니
신부님이 집에 가서 주기도문 열 번을 외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어린애 같은 마음이 되어
그냥 그대로 했다.
정희성은 ‘오십 평생 살아오는 동안 삼십 년이 넘게’군사독재의 체제 속에서 살았다고 증언한다. 사실은 20대에 이르러 비로소 독재의 실체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독재의 주체자뿐만 아니라 그 밑에 빌붙은 세력들에 대한 증오와 미움으로 세월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자신도 인간성이 상실된 존재가 된 것을 깨닫고 자기 모멸감에 빠질 정도가 되었다. 그들을 미워하는 자기 자신마저 미워진 것이다. 다시 말해, 그들을 미워하다가 그들을 닮아버린 자신이 싫어진 것이다.
상대방을 고치고 변화시키고자 하는 변영로의 ‘미움’, 즉 상한 심정의 미움이 아닌, 증오 그 자체로 미워하면 자신도 모르게 미워하는 대상을 닮아가게 된다.
빈 배
- 토머스 머튼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 배가 그의 배와 부딪치면
그가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일지라도
그는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이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그대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마음을 ‘빈 배’로 만드는 일이 그리 만만치는 않다. 하지만 나름대로 마음 수양을 통하여 ‘빈 배’의 경지에 이른다면 생활 가운데 수시로 일어나는 마음의 감정들에 휘둘리지는 않을 것이다.
애착이 클수록 미움도 크다!
미움이라는 감정이 단독으로 존재하는 경우는 드물다. 미움과 애착은 선망과 질투처럼 서로 안팎을 이루고 있다. 애착이 많은 만큼 미움도 많아지는 법이다. 에로스의 화살에도 황금촉 화살과 납촉 화살이 있다. 황금촉은 날카롭고 납촉은 뭉툭하다. 황금촉 화살을 맞은 사람은 사랑(애착)에 빠지고 납촉 화살을 맞은 사람은 미움에 빠진다. 뭉툭한 화살촉은 몸에 박히기는 쉽지 않지만 한번 박히면 좀체 뽑기가 힘들다.
미움과 애착이라는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흔히 애증(愛憎)이라고 한다. 심리적 용어로는 ‘앰비밸런스(ambivalence)', 즉 양가감정이라고 한다. 카를 융은 ’심리적인 사실은 반대로 이야기해도 진실이다‘고 했는데 이 말도 미움과 애착 같은 상반된 감정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지하 생활자의 수기>에서 주인공은 여자에 관한 상반된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의 눈은 정욕으로 번쩍번쩍 빛나고 나는 그녀의 손을 으스러지도록 꽉 쥐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를 얼마나 증오하고 얼마나 사랑했던가! 이 두 개의 감정은 서로 부채질하며 타올랐다. 그것은 거의 복수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선시대 빼어난 시인이요 학자인 이덕무는 <사소절>에서 ‘선망과 시기심은 서로 안팎으로 이루고 있으므로 먼저 선망을 없애버리면 시기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고 말했다.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는 분수에 맞지 않는 선망으로 자기 인생과 가정이 파탄 나는 여인의 일생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다. ‘~사실 애써 찾아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 다 거짓이다. 미소마다 그 뒤에는 권태의 하품이, 환희마다 그 뒤에는 저주가, 쾌락마다 그 뒤에는 혐오가 숨어 있고 황홀한 키스가 끝나면 입술 위에는 오직 보다 큰 관능을 구하는 실현 불가능한 욕망이 남을 뿐이다.’
이와 같이 현대판 마담 보바리들이, 부러워할 필요가 없는 것들까지 부러워하고 욕심을 내다가 가정 파탄과 함께 전락하고 마는 사례가 더욱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는 인생의 경지에 이르러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삶은 없을 것이다.
바울도 자족하는 삶을 간곡히 권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디모데전서6:7-10)
<‘미움 극복' P359 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조성기님글,중앙북스출판>
* 조성기 : 1951년 고성출생. 서울법대, 장로회신학대학원 졸업. 1971년<만화경>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등단.<우리시대의 소설가>로 ‘이상문학상‘ 수상. <우리시대의 소설가>, <야훼의 밤>, <왕과 개>,<통도사 가는 길> 등 다수의 작품. 숭실대 교수로 재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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