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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백수가 됐습니다!

[중산] 2022. 3. 19. 12:44

조금 전 백수가 됐습니다.

 

낯설도록 텅 빈 책상을 천천히 둘러 본 뒤 몸을 일으킵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구나. 낡은 몸을 기대게 해주던 의자에 인사합니다. 미리 조금씩 정리해둔 덕분에 따로 들고 나갈 건 없습니다. 스스로와 약속한 대로 바람인 듯 나서면 그만입니다.

 

화장실이라도 가듯 천천히 걸어가 편집국 문을 나섭니다. 후배 몇 명이 전송하고 싶어 하는 눈치지만, 미리 부탁한 대로 해달라고 눈짓으로 눌러 앉힙니다. 끝내 바람 닮은 뒷모습이기를 소망합니다. 문을 나서는 순간, 진공의 공간에 든 듯 모든 소리가 멈춥니다.

 

로비에 문이 또 하나 있습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문이지만, 이 순간 제게 다가오는 의미는 남다릅니다. 이제 저 문을 나서면 다시는 사원이란 이름으로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다시는 책상에 앉을 수 없고 비밀번호를 입력해 컴퓨터를 깨울 수 없습니다.

 

문 앞에 서니, 퇴직하던 날 기둥에 기대어 하염없이 울던 옛 동료가 생각납니다. 저는 울 생각은 없습니다. 쿵쿵 소리라도 낼 듯, 큰 걸음으로 문을 밉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새로운 세상이 와락 안깁니다. 아침에 출근할 때와 달라진 건 없겠지만, 이 순간 제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 것입니다.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갈 곳이 없습니다. 오른쪽? 아니면 왼쪽? 낯선 골목에 들어선 아이처럼 잠시 우두망찰입니다. 이런 심사로 집에 갈 수는 없습니다. 강아지들만 반기는 공간에 불쑥 들어가면 밤이 올 때까지 혼자 펄럭거릴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사람 저사람 불러낼 생각도 없습니다. 불러낼 이가 없어서가 아니라, 누구의 시간에도 신세를 지고 싶지 않은 결백 때문입니다. 문득, 두고 온 난 화분이 걱정됩니다. 내가 물을 주지 않아도 잘 살아낼 수 있을까? 아침에 마지막 물을 주며 당부한 말들을 기억이나 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머물다 나올 걸 그랬습니다. 누가 등을 떠미는 것도 아닌데, 급히 갈 곳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리 서두를 건 뭐람. 하지만 별 문제는 없습니다. 그늘 좋은 공원에 찾아가 몸을 맡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저 오래 걷지요. 조금씩 뒷걸음질 치는 회사를 돌아봅니다.

 

잘 있거라, 내 사랑하는 것들아. 잘 있거라, 내 미워하던 것들아. 내 청춘아. 열심히 살아왔다고 스스로 위안합니다. 아니, 자신을 너무 다그치며 살아온 세월이었습니다. 다만, 끝내 돈과 불화했고, 걸음은 늘 출세로 가는 길에서 어긋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가난하고 내일의 밥을 걱정해야 하지만, 다시 산다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마음속으로 스스로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괜찮다, 괜찮다. 넌 최선을 다해 걸어온 거야. 괜찮습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저 다리 하나 건넜을 뿐입니다.

 

내일이면 저 하늘에 사가리 걸어, 호미 하나 들고 오를 것입니다. 태양이 있는 곳까지 등뼈 녹아내리도록 오르고 올라, 씨앗 하나 파종할 것입니다. 하늘이 참 높습니다. 태풍이 온다는데 당신에게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자작나무 숲으로 간 당신에게’ P367중에서 극히 일부 발췌, 이호준지음, 마음의숲출판>* 이호준님 :지난10년 간 사강이란 필명으로 에세이와 칼럼을 썼으며,<사라져가는 것들, 잊혀져가는 것들1·2>,<클레오파트라가 사랑한 지중해를 걷다>,<아브라함의 땅 유프라테스를 걷다>등을 저술 시인이자 여행작가로 활동과 강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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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자나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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