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여행하는 인간~!

[중산] 2019. 11. 6. 10:31

니체는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여행자의 등급을 나누어 이렇게 이야기 했다. “사람들은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구분한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하면서 오히려 관찰당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눈먼 자들이다.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실제로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 등급의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에서 그 무엇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그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자신 속에 가지고 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신이 관찰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동화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기필코 다시 되살려 내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여행자에 대한 이 다섯 부류에 따라 대체로 모든 사람들은 삶의 모든 여정을 지나간다.”


‘뇌 가소성’에 대한 초기 연구자이자 일리노이대학교 교수인 윌리엄 그리노 박사는 중년 또는 노년의 쥐들을 대상으로 환경에 따른 뇌의 변화를 실험했다.“새로운 경험을 한 동물들은 이전보다 훨씬 짜릿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동물들은 이전에 익숙했던 무미건조한 생활공간 속에서만 지내다가 새로운 환경에서 난생처음 인생을 즐기게 된 것이 기쁜가 봅니다. 쥐들은 마치 정신적인 운동이 뇌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듯합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명체는 기꺼이 새로움을 경험하려고 한다. 반복된 일상에서 권태와 무료함을 느끼고 새로운 자극을 찾아 나선다. 생명체는 긴장이 크면 이를 감소시키려 하지만 긴장이 없으면 긴장을 만들어 내는 즉, 창조적 긴장을 유지하려는 향상성(homeostasis)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여행은 휴식이 되고 있는가?

특히 일상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의 여행은 도피나 중독으로 흘러가기 쉽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쾌락에 대한 욕구는 커지게 마련이다. 스트레스와 불안을 살피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잊으려고 하는 것이다.

현실이 고되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들의 여행 역시 소비와 쾌락의 강도가 높다. 초호화 여행을 떠나고, 여행의 주 일정을 쇼핑이나 유흥으로 채우고, 심지어 카지노에서 도박을 하고, 성매매를 하기도 한다.


이 경우 쾌락의 특성상 점점 더 강한 쾌락이 주어져야만 즐거움을 얻기 때문에 여행은 점점 일탈로 치닫는다. 쾌락은 결코 휴식이나 충전이 되지 않는다. 마약성 진통제의 효과가 빠르게 떨어지면 더 큰 통증이 오기 때문에 다시 더 많은 약을 필요로 하게 된다.

어떤 여행은 여행이라기보다 노동에 가깝다. 비행기 좌석에서 쪽잠을 자는 것으로 시간을 벌고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강행군을 시작한다. 짧은 시간 안에 갈 곳도 많고 할 일도 많다. 여행을 와서도 삶의 속도는 달라지지 않으며 제대로 휴식하지도 못한다. 여행이 끝나도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이것 저것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경험한 것 같지만 남는 것은 피곤한 몸과 잡다한 물건들 그리고 사진밖에 없다.


기록의 과잉은 여행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여행에서의 사진 등 촬영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뇌는 덜 느끼고 덜 기억한다.

많은 현대인들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놀이와 휴식을 비생산적으로 본다. ‘내가 이렇게 놀아도(쉬어도)되는가?’라는 질문에 불안을 넘어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방어는 여행을 일처럼 하는 것이 된다.


휴식이 삶의 한 리듬으로 자리 잡지 못한 사회의 사람들은 여행다운 여행을 가는 것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진정한 휴식으로서의 여행이란 뭘까? 핵심은 휴식이 에너지를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채우는 것이라는 점이다. 휴식으로서의 여행은 삶의 활력을 되찾는 여행을 말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속도와 건강한 자극이 필요하다. 자신과 잘 맞고 영혼이 원하는 활동으로 채워진 여행을 해야 한다.


가장 좋았던 것은 알프스에서의 캠핑이었다. 낮에는 알프스 산등성이를 걸어 다니고, 밤에는 좁은 텐트 안에서 서로를 껴안고 잠들던 그때가 가장 마음이 편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이것이 휴식이구나!’를 절로 느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나는 계속 알프스를 그리워하며 시름시름 앓았다. 결국 그리움은 나를 히말라야로 이끌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통해 진정한 휴식은 여유 시간이 많을 때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주도권을 되찾을 때 찾아오는 것임을 느꼈다. 그리고 진정한 휴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편안함이 아니라 스스로 원하는 활동을 하면서 느끼는 능동적인 몰입임을 깨달았다.


그런데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웠다. 속도 조절이 잘되지 않았다. 늘 어떤 목적지를 향해 빨리 걷는 데만 익숙했다. 나는 매일 발걸음을 의식하며 걸었다. 그랬더니 조금씩 변화가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컨디션이나 주변 풍경에 따라 속도를 선택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속도가 느려지니 감각이 살아났다. 길가의 야생화가 눈에 들어오고,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이 느껴지고, 강물이 흐르는 소리와 불벌레 울음소리가 뚜렷하게 들려왔다. 특히 거정했던 고지대에 접어들면서 속도를 더욱 조절할 수 있었다.

안식년 이전에 나는 속도중독에 빠져 있었다. 그저 빨리 도착하는게 중요했다. 바쁠 때나 바쁘지 않을 때나 삶의 속도는 다르지 않았다.


여행은 자신의 페이스를 되찾고 주도적으로 시간을 쓰는 방법을 익힐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심리학자인 ‘로버트 레빈’은 시간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가에 이렇게 썼다.

“여행을 하게 되면 빠른 시간과 늦은 시간, 시계 시간과 사건 시간,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 사이의 균형점인 중간 시간의 미학을 배우게 된다.(중략)신체적 고통과 만족이 우리의 신경관들을 통해 전달되는 것처럼 심리적 만족은 시간을 통해 전달되는 것 같다. 시간이 압축되고 단축되면, 시간은 만족을 질식시키고, 시간이 무한정 처지면 자아가 밋밋한 무감동으로 늘어진다. 만족은 중간 시간에 존재하는데, 그 중간 시간이라는 것은 지나치게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시간을 말한다. 최고의 만족은 압박이 중간 수준에 있을 때 경험된다.”


삶의 감각이 상실되는 현상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박차고 일어나 훌쩍 여행을 떠난다. 도피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충전을 위한 시간일 것이다. 새로운 곳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을 동시에 겪어야 하는 과정이다.


여행 후 증후군

나는 여행이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마음의 병을 앓았다. 프랑스 인류학자 테오도르 모노가‘사막의 순례자’라는 책에서 예언한 내용이 딱 들어맞았다. “고독한 보행의 크나큰 피로가 잊히자마자 곧 그 힘들었던 여정과 살갗이 벗겨진 발, 터진 입술, 별빛 아래에서 잤던 새우잠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다”


‘행복 후 증후군‘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여행이다. 여행은 가장 강렬한 행복 체험이다. 그렇기에 불멸의 기억이 된다.

우리의 무의식은 우리를 어느 시간으로 데려갈까? 그것은 생의 아름다운 시간이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받았던 시간, 마냥 즐겁게 뛰어놀았던 어린 시절, 도전과 성취를 통해 자신감을 느꼈던 시간, 첫사랑을 했던 시간, 잊을 수 없는 추억과 사연이 깃든 여행의 시간....즉, 생애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 심리적으로 자원이 가장 풍요로웠던 시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과연 여행은 아름다운 시간인가?

뜻밖의 사고나 질병을 만나 말 그대로 고생으로만 얼룩진 여행도 있을테고, 같이 여행을 간 사람과 다투다가 기분만 상해서 돌아온 여행도 있을 것이다. 여행지에 환상이 깨지면서 실망으로 돌아오는 여행도 있을 수 있다. 일본 젊은 여성이 청결하지 못한 도시, 불친절한 프랑스인들, 소매치기 등의 범죄를 경험하면서 겪은 ‘파리 증후군’등도 있다.

아무튼 우리의 기억이란 믿을 게 못된다. 기억은 늘 완전하지 못하다. 기억은 언제나 선택적이며 자신의 마음에 따라 사실조차 왜곡되기 쉽다.

여행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여행을 다녀오면 우리는 자신의 여행을 미화하기 시작한다. 공개적으로 남기기라도 한다면 더 그렇다. 사실 대부분의 여행에는 행복감만큼이나 괴로움과 불편함이 섞여있고 즐거움만큼이나 무료함과 밋밋함이 가득하다.


평범하고 밋밋한 시간들이 있기에 여행동안 느꼈던 잠깐의 행복이나 즐거움의 순간들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전체를 놓고 보면 대부분의 시간은 평범하고 무료하다. 하지만 그 무난한 흐름을 뚫고 올라오는 불꽃같은 시간들이 있다. 바로 도전, 사랑, 여행 들을 하는 시간이다.


삶은 전환의 연속이다. 우리는 살면서 여러 번의 전환을 맞이 한다. 자기 주도적인 삶이란 어쩔 수 없이 변화하는 수동적 전환보다는 스스로 원하는 삶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능동적 전환에 의해 이뤄진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여행은 능동적 전환의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행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여행을 통해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행하는 인간’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문요한 정신과의사 지음, 해냄출판>



* 지금까지 헤밍웨이, 소로우 등을 통해 여행에 관한 작가들의 문학적 내용만 접해보았다.‘여행하는 인간’은 현대인의 스트레스와 심리상태, 여행의 장단점과 삶의 방향 등을 제시하는 폭 넓은 전문지식과 진솔한 경험을 전달한 책으로 여겨진다. <중산> 






                                                                                 <청송 가을 주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