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인간 아닌 다른 생명체를 대하면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보지 않는다. 이런 책을 통해서 우리는 철학적 인간학에 기초하여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리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초연함의 태도를 가져볼 필요가 있다.
물고기는 회를 뜰 때 아픈 것을 느낄까? 애완견은 주인이 주는 먹이와 사랑에 행복해 할까? 동물은 자기의식을 소유할까? 소유하지 않을까? 생명체를 다룰 때 윤리적 관계를 철학적으로 접근해서 생각해보자~!
존 R. 설은 자신의 개가 나무를 보고 짖으며 위를 바라 볼 때 고양이가 나무에 있다는 것을 믿고 있다고 기술한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고양이가 뛰어 올라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는 왜 나중에 옆집 정원으로 뛰어 드는가? 개가 거기로 고양이가 뛰어드는 것을 보았고, 고양이가 나무에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믿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은 지각에 근거해서 지속적으로 확신을 수정한다는 사실은 공통적인 것이다. 이렇게 수정하기 위해 동물은 확신이 충족되는 사태연관을 충족되지 않는 사태연관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언어행동이론을 개척한 존 R.설에 따르면, 의지 표현은 언어행동으로 파악될 수 있다. “언어가 없다면 사고가 없다”는 주장은 오래전에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고수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칼 폰 린네는 동물과 식물에 대해 기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름을 부여하고 유형적인 종개념에 근거하여 형태가 비슷한 유기체를 ‘자연의 체계’안에 배치하였다. 그러나 동물과 식물을 구별한 고전적 서열은 모든 유기체에 들어맞지 않았다.
해면동물 또는 산호초와 같이 장소에 고착된 ‘식물성 동물은 결과적으로는 동물로 밝혀졌다. 동물의 운동과 유사한 행동을 보이는 식물들도 발견되었다. 이 식물들은 전신식물처럼 자발적으로 각각의 잎을 움직이거나 함수초 처럼 다른 물체에 접촉하면 수축할 수 있다.
고전적 동물 개념은 다음이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감각적 존재, 본능적 존재, 자동기계로서의 동물 개념, 그리고 20세기에 집중적으로 고찰된 주체로서의 동물개념이다.
감각적 존재로서의 동물
동물학 저서들을 집필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동물생물학 또는 동물학의 창시자로 꼽힌다. 그는 일차적으로 동물을 감각적 존재로 이해하는 철학적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르면 동물은 특별한 감각기관을 가진 감각 영혼에 기초하여 삶의 경험을 축적하고, 그에 상응하여 행동을 할 수 있는 생명체이다. 동물은 욕구충족을 위해 방향을 잡는 공간운동을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먹이를 조달하거나 종을 번식시킬 수 있다.
본능적 존재로서의 동물
‘본능(Instinkt)’이란 용어는 18세기에 ‘자연충동’이라는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찰스 다윈 이후 사람들이 ‘동물’, ‘식물’ 또는 ‘인간’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역동적 질서 속에 다시 배치되었다. 스토아철학자, 스콜라철학자는 동물이 본질적으로 본능, 즉 ‘예술충동’에 의해 움직이지만 그럼에도 내적 감각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고 여겼다.
자동기계로서의 동물
일반적으로 르네 데카르트가 원조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스페인 출신 의사 고메즈 페레이라가 동물은 어떤 감각적 영혼도 없다는 주장을 하여 비판받은 바 있었다. 생물학적 ‘기계주의자’들은 동물을 물리화학적 상호작용으로 여겼다. 그들은 유기체를 실험실의 자동기계로 생각했다. 20세기 말에 이러한 기계론은 뇌에서 일어나는 전자기적 상호작용과 연결되었다.
동물 자동기계론은 많은 계몽주의자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계몽주의자 피에르 벨은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동물을 어떻게 대하는가?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동물들을 갈기갈기 찢고, 영양공급을 위해 교살하고, 단순히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 있는 채로 내장을 파헤친다.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동물 지배권 덕분에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죄 없는 영혼을 수많은 재난에 빠지게 하는 것은 데카르트의 이론덕분에 그러한 모든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사람들은 그때마다의 개별적인 자기경험에서-데카르트가 주장한-선천적관념을 가진 특별한 비물질적 실체, “기계 속에 있는 유령”, 비물질적인 사유하는 사물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유하는 사물에서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이성, “나는 생각한다”가 살아있는 인간의 보편적 도구로서 발원한다. 그러나 동물 자동기계론에는 고전적 데카르트주의자가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정신은 없다. 따라서 동물은 실제로 자신이 쾌와 고통을 가지는 존재인지를 전혀 파악할 수 없다. 동물은 자아에 대한 어떤 개념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고통을 가지는 존재인지를 알지 못한다.
놀라운 것은 통찰력을 가진 철학자들이 여전히 데카르트와 유사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당연한 것으로 인정되는 ‘사고’, ‘언어(도날드 데이비슨)’, ‘현상적 의식(피터 카루더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능력(레이몬드 프레이)을 동물에게서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극단적이고 예외적인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러한 주장들을 윤리적으로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
주체로서의 동물
동물학의 주체이론들은 동물 자동 기계론 아니면 영혼을 주제로 하는 형이상학의 난제에 연루되어 있다. 헬무트 플래너스는 모든 생명체가 외적 측면과 함께 내적 측면을 가진다고 한다. “동물은 육체이다. 그 육체가 중심적 표상 속에서 주어지는 한에서 동물은 신체로서 육체를 가진다. ....이러한 자기로서 동물은 모든 생명체가 그런 것처럼 자기 존재의 주체일 뿐만 아니라 자기를 소유하는 주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동물은 의식을 갖는다. 이 의식을 통해 동물은 자신의 ‘신체’를 갖는다. 그러나 동물은 자기의식을 소유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때의 자기가 그 자신과 거리를 두고 주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은 의식의 중심에 고착되어 있다. 의식의 중심과 관련을 맺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동물은 그럴 수 없다. 플레스너의 말로 표현하면, 폐쇄된 조직형식을 가진 동물은 중심적 입지성 속에 머물러 있다.
연결된 두 요소, 즉 신체적 존재와 육체의 소유는 동물의 현존방식에서는 결코 이중적 측면으로 대상화될 수 없다. 이러한 대상화는 ‘탈중심적’ 입지성속에 있는 인간에게 가능하다. 동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요나스는 식물과 비교를 통해 설명한다. “세 가지 표시, 즉 운동능력, 지각, 느낌이 동물의 생명을 식물의 생명과 구별한다.” 동물의 활동공간에는 한편으로는 특정한 ‘자유’가 연결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실수와 실패의 위험도 존재한다.
“동물적 존재는 그 본질에 있어 욕망의 존재이다.” “동물은 단순히 물질대사를 하는 존재가 아니라 느끼는 존재로서 자신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계약론자 에피쿠로스는 동물은 계약을 맺을 수 없으므로 법공동체로부터 배제된다. 에피쿠로스의 핵심원칙은 다음과 같다. “상호간의 상해에 대한 보호 계약을 맺을 수 없는 생명체에게는 법(정당한 것)도 불법(부당한 것도 없다.”
데이비드 흄은 홉스의 견해와 기본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흄 역시 정의로운 공동체가 계약을 통해 정립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동물이 얼마나 이성을 가졌는지는 다른 자[인간]가 결정해야 한다. 흄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수준에 따라 규정하고 있지만, 그도 동물을 정의로운 공동체로부터 배제한다.
흄에게서 정의는 개별적인 인간의 결핍이 만들어 내는 의지, 즉 권력포기의 의지에 근거한다. 왜냐하면 욕구의 결핍은 협동을 통해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동물은 법 밖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자연은 동물에게 육체적 힘과 욕망 사이에 안정된 균형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과는 달리 약한 동물은 욕심이 적으며, 강한 동물은 개별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다. 흄은 스토아학파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 그대로 동물의 무이성성(無理性性)으로부터 도움은 인간의 삶을 추구하는 덕 윤리의 목적으로서 행복, 즉 ‘유다이모니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소, 말, 개 그 밖의 동물이 ‘행복하다’고 표현할 수 없다.
플라톤에 따르면 감각과 쾌락에 따라 비철학적 삶을 영위한 사람은 그 성격에 상응하는 동물로 변신한다. 그리고 많은 동물이 분노하는 영혼의 부분을 인간과 공유하고 있을지라도 그러한 동물을 진정 용감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동물에게는 용감함의 덕으로 이끄는 이성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게 동물에 대한 동정은 ‘사람들이 확신을 가지고 동물에게 잔혹한 인간은 좋은 인간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은 성격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브라만처럼 육식을 억제해야 할 정도로 광범위하게 적용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자연에서 고통의 능력은 예지적 능력에 비례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를 계승한 동정윤리학자 우르슬라 볼프는 ‘자연적 감정’으로 동정은 분명히 ‘범위가 제한된 것’으로 여겨 도덕적 권리를 일반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보편적 동정 개념’을 발전시켰다. 볼프 역시 고통을 적게 해주는 동물도살의 합법성이 문제될 때 고통의 능력, 죽음의 의식 또는 삶의 의지에 대한 확인을 위한 경험적 기준-이 기준을 통해 소위 물고기와 같은 하등동물은 인간의 육식을 위해 희생될 수 있다-을 제시해야했다.
그는 ‘사실상 모든 동물의 도살’을 ‘비도덕적인 것’으로 증명하고 싶어 했지만 그 역시 자신의 이론이 그것을 위한 ‘강력한 논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칸트는 동물학대 금지 이외에도 동물의 사용과 도살에 관련하여 동물이 느끼는 고통의 능력과 욕구에 대하여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늙은 말이나 개가 오랫동안 수행한 봉사에 감사하는 것조차 간접적으로는 인간의 의무일 따름이다.”
왜 칸트는 동물에 대한 직접적인 의무를 정식화하지 않았는가? 칸트에 따르면 평등한 정의와 연결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존재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경험적으로 주어져야 한다. 둘째, 존재하는 것은 도덕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이성적 의지를 소유해야 한다.
첫 번째 조건이 신에게는 빠져있고, 두 번째 조건이 동물에게는 빠져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자율적인 의지와 연관 될 수 있어야 하는 권리의 관계는 신과도 동물과도 맺을 수 없다. 그러나 칸트는 도덕적 관점에서 동물의 고통은 물론 동물의 욕구를 배려하였으며, 나아가 의무와 책임의 의무라는 새로운 차원을 위해 엄격하게 평등을 유지하는 이성공동체를 제시했다.
이익윤리학자 조엘 파인버그는 “사람들이 권리를 인정할 수 있는 존재에는 정확히 이익을 가지는(또는 가질 수 있는)자들이 속한다. 파인버그의 ‘이익원칙’은 도대체 어떤 존재가 도덕적 권리를 가질 수 있는가”를 해명하는 ‘개념 분석적 논제’로서 이해된다.
파인버그는 동물, 식물, 생명체 종, 죽은 것, ‘연명 치료하는 인간’, 태아, 낙태, 미래세대에 주목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는다. “의식, 기대, 확신, 열망, 목표 또는 목적 없이는 어떤 존재도 이익을 가질 수 없다. ‘인간과 평등한 방식으로 동물에게 생명권을 부여하는 것‘을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확고한 도덕적 권리의 자연법칙 존중과 멀어지는 것이다.
’깨어 있는 양심의 원칙‘도 도덕적 권리의 존중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가 제시한 원칙들이 어떤 근거의 자격을 가지는지에 대한 물음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렇지만 그는 이익의 소유라는 조건에서 동물을 앞으로(미래세대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권리를 가질 수 있는 대상으로 여긴다. ~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동물철학’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한스 베르너 인겐시프, 하이케 바란츠케지음, 김재철님 옮김, 파라아카데미출판>* 한스 베르너 인겐시프 : 독일 뒤스부르크-에센 대학에서 철학 및 과학사를 가르치는 교수이다. 하이케 바란츠케 : 독일 본 대학의 신학과에 소속된 공동연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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