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걸어서 12,700Km 종주한 여성!

[중산] 2021. 9. 24. 13:10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4,277킬로미터, 총상승고도 149,000미터.

최고 해발고도 : 포레스터 고개, 시에라네바다 산맥 4,009미터

통과 연방 주 : 캘리포니아 주, 오리건 주, 워싱턴 주

 

트레일 위에서의 삶은 행복의 기준을 상향시키기는커녕 어마어마하게 끌어내렸다.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어떻게 하루하루를 보냈는지 되돌아보면 내게 진정 필요한 것이 얼마나 적은지도 금세 알 수 있었다. 먹을거리, 물, 온기, 궂은 날씨를 피할 장소, 이 모든 것이 몇 킬로그램에 불과한 작은 배낭 안에 들어 있었다. 지금 내게는 그 이상으로 누리게 되는 모든 것이 어마어마한 행복감을 안겨줬다.

 

사막에서 1주일을 걸은 뒤에 하는 샤워, 몇 주 동안 맨바닥에 얇은 발포매트를 깔고 잔 끝에 푹신한 침대에 드러눕는 일, 그리고 뜻밖에 얻은 초코바 한 개가 그랬다. 예전의 나는 인상된 급여가 통장으로 들어오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곤 했다. 그 돈으로 무언가를 구입함으로써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무는 것만으로도 순수한 행복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현재 기온은 영상 7도에 불과했고, 나는 이미 뼛속까지 젖어 있었다. 지독한 날씨에 기분이 침울해질까 봐 우리는 쉼 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러나 어차피 스루하이커들의 대화는 거기서 거기였다. 한정된 화젯거리 중 첫 번째는 당연히 음식에 관한 것이었다. 두 번째는 대소변의 색깔과 냄새, 묽기에 관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대소변이 건강 상태를 어림하는데 훌륭한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오전 중에는 하루 동안 먹을 간식거리의 절반을 걸으면서 먹는다. 초콜릿이나 젤리, 혹은 견과류 200그램에 해당한다. 점심으로는 조그마한 가스버너에 즉석식품을 데워 먹고 오후에 남은 200그램의 간식으로 에너지를 보충한다. 오후 6시가 되면 저녁 먹을 장소를 물색한다.

 

적당한 자리를 발견하면 먼저 즉석식품을 조리하고 냄비와 손을 깨끗이 씻은 뒤 최소한 2킬로미터를 더 걷는다. 그래야 밤중에 곰이 음식 냄새를 맡고 접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 아침부터 저녁 8시까지 나는 35킬로미터를 걸으며 1킬로그램의 음식을 섭취하고 최소한 5,000마리의 모기를 잡는다. 그리고 마침내 적절한 장소를 찾아 텐트를 치고, 늦어도 9시면 침낭 안에 들어가 하루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

 

맑디맑은 호수, 눈 덮인 산봉우리, 들꽃이 만발한 풀밭 등을 떠올리노라면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감이 나를 휘감는다.

남은 몇 알의 초콜릿을 정확히 언제 먹으면 적절할까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데 30대 남녀 한 쌍이 내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걷기는 좀 어때요?” “PCT 스루하이커이신가 보네요.” 예. 맞아요.” “세상에, 진짜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걸어가는 거예요?” 여자쪽이 감탄하며 말했다. 두 사람 다 탄복하는 눈빛이었다.

 

지난 몇 주 동안 나는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당일치기 등산객 또는 ‘주말전사(Weekend warrior)’라 불리는 주말 여행객들에게 스루하이커는 그야말로 하이킹의 신 같은 존재였다. 나는 이미 ‘어느 나라에서 왔어요? 어디까지 가세요? 혼자 다니면 무섭지 않아요?“ 등의 질문 세례를 받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GT 씨, 미국 트레일을 완주한 사람들이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을 알고 있죠? 하나만 완주한 사람, 아니면 세 개를 모두 완주한 사람. 두 개만 완주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적어도 자의로는 말이예요.“ 

“예, 들어봤어요. 어째서 그런 거죠?“

“트레일 하나를 종주하면서 장거리 도보여행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세 트레일을 모두 정복할 때까지 멈출 수 없게 되어버려요. 그런데 첫 번째 트레일 경험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은 사람은 이 고되기만 한 여행을 두 번 다시는 하려 들지 않죠.”

 

PCT(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의 마지막 하루는 비와 함께 시작했다. 우리 앞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35킬로미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PCT는 마지막 날이라고 해서 봐주는게 없었다. 해발 2,000미터에 이르자 빗방울이 눈송이로 변했다.

 

눈앞에 밀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캐나다가 가까워져 올수록 우리는 점점 더 들떴다. 모두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오늘 저녁에 있을 완주 기념파티 계획을 세웠다.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국경에 도달하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기둥에는 ‘퍼시픽 크레스터 국립경관 트레일-북단 출발점’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다섯 달 하고도 하루 전에 내가 서있던 멕시코 국경의 PCT 기념물과 똑 같은 모양이었다. 

 

트레일 완주 끝에 나체 사진을 찍는 괴상한 스루하이커 전통에 대해서는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사진으로도 이미 많이 봤다. “옷을 몽땅 벗어야 하나요? 사진이 인터넷에 올라가기라도 하면 부모님이 집에서 쫓아낼지도 몰라요.”

 

“좋아요. 그럼 상의만 벗는 걸로 하죠. 물론 모두 사진을 절대 유출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고요. 자, 이제 가진 옷들 중에서 제일 섹시한 의상을 입으세요!”이윽고 샛노란 깃털 장식을 하나씩 두른 반라의 여자 다섯 명은 PCT 기념물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남자들은 열광하며 셔트를 눌러댔다.

 

시애틀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는 비행기로 두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걸어서 완주하는데 다섯 달 하고도 하루가 꼬박 걸린 거리를 이렇게 쉽게 갈 수 있다니, 창가 좌석에 앉아 넋을 잃은 채 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멕시코에서 캐나다까지, 오로지 혼자서, 중간에 마주친 모든 장애물도 극복하고서 말이다. 사막의 불타는 열기도, 그칠 줄 모르고 쏟아지던 북서부 태평양 연안의 비도, 시에라네바다의 눈 덮인 고개도, 오리건의 거센 계곡물도, 곳곳에 도사리고 있던 방울뱀과 흑곰까지도 이 모든 것을 이겨냈는데 이제 무엇이 나를 가로막을 수 있겠는가?

 

PCT 코스!
시에라네바다 산맥의 호수(인용)

 

 

콘티넨털 디바이스 트레일(CDT)

- 멕시코에서 캐나다 국경까지 대륙분수계(로키산맥을 기준)를 따라 이어진 트레일, 4,200~5,000킬로미터까지 다양한 경로 존재. 최고 해발고도 : 그레이스피크, 로키 산맥 1,280미터. 통과 연방주 : 뉴멕시코주, 콜로라도 주, 와이오밍 주, 몬테나∙아이다호 주.

 

도보여행자들은 세인트 메리 관광사무소에서 글레이셔 국립공원 트레킹 허가증을 받고, 곰을 만날 경우에 대비해 안전교육 영상도 시청해야 한다. 일명 ‘곰 자루 매달기’라는 식량 보호 방법은 PCT에서 이미 배운 터였다. 

 

먼저 길고 가느다란 밧줄의 한쪽 끝에 돌을 하나 매달아 적당한 가지 위로 던진다. 줄이 나뭇가지에 걸리면 식량이 든 자루를 다른 쪽 끝에 단단히 묶어 위로 끌어올린다. 반대쪽 밧줄 끝 부분은 둥치에 매듭을 지어 고정시키면 된다.

 

CDT에서의 둘째 날 회색곰 무리를 만났다. 나보다 구릉을 기어오르던 밥이 먼저 곰을 발견하고는 얼어붙은 듯 동작을 멈췄다. 키가 2미터에 달하는 회색곰이 눈앞에 버티고 있는 광경을 보자 간담이 서늘해졌다.

 

밥과 나는 아주 천천히 물러났다. 조금이라도 허둥거렸다가는 곰의 사냥 본능을 깨울 수 있었다. 200~300미터 정도 물러선 뒤에야 곰 가족은 길 옆의 침엽수림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밥과 나는 또다시 단둘이 출발했다.

 

이제 3주 뒤에나 다른 여행자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닷새째 날에는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지더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기력을 완전히 소진한 내게 고산지대에서 날마다 32킬로미터를 걷는 일은 무리였다.

 

밥은 외로움에 찌들어 있었던 것이다. 2년 반 전에 울리케와 헤어지고 혼자 여행을 다니는 동안 여자가 그리웠던 눈치였다. 나는 어떤가? 지난 두 해를 나는 거의 일밖에 모르고 살았다. 날마다 열두 시간을 일하다 보니 미처 이성을 사귈 여유도 없었다.

 

2년 동안 차가운 인상의 전문직 여성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내심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애정을 나누고픈 마음이 간절했다는 사실을 이제야 사무치게 깨달은 것이다. 추운 것은 몸뿐이 아니었다. 강추위와 고독에 떨며 나는 침낭 속에서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밥과 나는 트레일 위에서 이상적인 동반자였다. 하지만 우리가 이성으로도 어울릴까? 밥은 무척이나 남자답고 잘생긴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 점을 제외하면 그와 나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밥은 미국인, 나는 독일인이었다. 게다가 밥이 겨우내 시골의 나무 오두막에서 자내는 반면, 나는 도시 토박이였다. 밥은 군인으로 복무하고 전역 후에는 거의 12년을 직업 없이 살았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액의 연봉을 받는 전문직 여성이었다. 

 

나는 자동조종장치처럼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걷기와 생각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전략을 썼다. 양발을 번갈아가며 앞으로 내딛는 동작을 하루 열두 시간 내지 열네 시간 동안 자동으로 반복하는 한편, 머리로는 다른 생각에 몰입한 것이다.

 

아이팟에 저장해온 음악을 듣거나, 해고된 뒤의 새로운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것인지도 숙고했다. 내가 어째서 계속 밥과 동행하고 있는 것인지도 고민해봤다.

 

“도대체 비가 언제쯤 그칠까요?” 너무 답답한 나머지 한탄이 절로 나왔다. 해발 4,000미터 지점인 이곳에는 자연의 위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위아래 우의를 갖춰 입었음에도 나는 뼛속까지 젖어버렸다.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앞을 향해 나아갔다. 잠깐이라도 멈춰 섰다가는 체온이 급속도로 떨어질 것이다. 손에 아무 감각이 없었다. 나는 충격받은 나머지 걸음을 멈추고 밥을 부르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입술과 혀가 말을 듣지 않았다. “밥∙∙∙∙∙∙∙∙”

밥은 태풍과 싸워가며 텐트를 치기 시작했다. 세찬 폭풍에 텐트가 날아갈 듯 펄럭였다. 밥은 발포매트와 침낭을 안으로 밀어 넣은 뒤 짤막하게 지시했다.

 

“옷을 모두 벗어요.” 즉각 그 말에 따랐다. 체온을 다시 올리려면 먼저 젖은 옷을 벗어야 한다. 밥이 넓게 펼쳐서 겹쳐 놓은 두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단열 효과를 내는 옷을 입지 말아야 체온이 잘 전달되기 때문에 밥 역시 벌거벗은 채 침낭으로 들어와 내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한 시간이 지나서야 오한이 잦아들었다. 손가락에서도 서서히 감각이 돌아오면서, 마치 뜨겁게 달궈진 수천 개의 바늘에 찔리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칠흑같은 어두운 밤에 텐트조차 없었더라면 빙점까지 내려간 기온과 폭우, 위력적인 태풍속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강한 돌풍이 불어온다 싶으면 밥과 나는 필사적으로 텐트를 움켜잡았다. 밤새 단 1분도 잘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비바람은 이튿날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잠잠해졌고, 나는 녹초가 되어 얕은 잠에 빠졌다. 동틀 무렵 기진맥진한 채 텐트를 들추고 바깥을 내다봤을 때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파란 하늘이 빛나고 있었다.

 

트레일에서 보는 경치는 숨 막힐 정도로 장관이었다. 마치 트레일이 지난 밤 내 생명을 위협했던 것을 보상해주려는 것 같았다. CDT의 아름다움은 사랑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치명적인 것이었다. 자연의 위엄은 나를 압도하는 동시에, 그 속에서의 내 존재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깨닫게 해줬다. 이곳에서 인간은 위계질서의 최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연은 날마다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고 무의미한 존재인지 일깨워줬고, 동시에 나는 아주 사소한 실수 하나로도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지난밤의 경험이 내게 가르쳐준 것도 겸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위축되기는커녕 끝없는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애팔래치아 트레일(AT)

-미국 동부 애팔래치아 산맥을 따라 이어진 트레일로 세 트레일 중 가장 거리가 짧고(3,508킬로미터) 도시와도 인접해 초보 도보여행자가 많다. 총상승고도 : 142,000미터. 통과 연방주 : 조지아 주, 로스캐롤라이나 주, 테네시 주, 버지니아 주, 메릴랜드 주, 펜실베이니아 주, 뉴저지 주, 뉴욕 주, 코네티컷 주, ~메인 주.

 

이미 넉 달 전부터 준비해온 일이었다. 집을 빼기로 통보하고, 갖고 있던 물건은 모두 팔거나 나누어 줬다. 나머지는 이사박스에 포장해서 창고를 빌려 보관해뒀다. 이렇게 나만의 안식처를 포기한 것이 과연 잘한 결정인 걸까? 

 

숙고를 통해 내린 합리적인 결정이었음에도 집을 포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일부터는 텐트가 내 집이었다. 그러나 벽의 두께가 1밀리미터인 텐트는 그리 안전한 안식처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나는 고램의 레스토랑에서 호사스러운 만찬을 즐기고 편안한 호텔에서 묵으며 나의 마흔한 번째 생일을 보낼 계획이었다. 거친 길이 계속되어 24킬로미터만 겨우 걸을 수 있었다. 마후석 골짜기는 메인 주에 있는 마후석 산맥의 사이에 움푹 파인 골짜기였다.

 

골짜기는 마치 거인이 바윗돌을 가지고 구슬치기를 하는 장소 같았다. 나는 거대한 바윗돌 아래를 기어서 통과하느라 몇 번이나 배낭을 벗어야 했다. 골짜기를 반쯤 통과했을 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폭우가 쏟아졌다. 이끼 낀 바위에 빗물까지 흘러 위험하기 짝이 없는 상황이었다.

 

2킬로미터가 채 안되는 거리를 가는데 거의 세 시간이 걸렸다. 미끄러운 나무뿌리를 밟고 또 한 번 넘어지자 마침내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망할 AT같으니!” 생일 만찬은 인스턴트 감자 퓌레와 스니커즈 한 개였다. 식사를 마친 뒤 지친 몸을 이끌고 축축한 침낭 속으로 기어들어간 나는 다행히도 쓸데없는 생각이 떠오르기 전에 잠에 빠져 들었다.

 

AT는 거의 숲을 관통하며 이어지기 때문에 ‘기나긴 초록 터널’이라 불렀다. 가도 가도 보이는 것은 나무뿐이었다. 미국 서부의 장대한 파로나마를 보고 나서 AT에 오니 처음에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여러 주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런 기대감을 내려놓고 AT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PCT동행자였던 )팩맨의 표현대로 마음을 ‘느긋하게’ 먹게 된 것이다. 그러자 지루하게만 느껴졌던 AT가 별안간 흥미진진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큰 소득은 야외에서 자연과 더불어 지내는 일, 트레일 위에서의 단순하고 자유로운 삶이 바로 그것이었다. 멋진 풍경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이 보일 때까지 걷기‘ P451 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크리스티네 튀르머 지음, 이지혜님 옮김, 살림 출판>

* 크리스티네 튀르머 : 청소년기의 그녀는 운동이라면 질색하는 소녀였다. 39세에 최고운영책임자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듬해 고급회사 차량과 개인비서는 물론이고 안락한 집까지 포기해버린다. 오로지 텐트에서 잠을 자가며 12,700킬로미터를 두 발로 종주하기 위해서였다. 멕시코와 캐나다 국경 사이의 PCT(4,277킬로미터),CDT(4,900킬로미터), 그리고 미국 동부에 있는 AT(3,508킬로미터)를 모두 정복한다. 이로써 그녀는 미국 장거리 하이킹 협회가 세 트레일 모두 완주한 사람에게 주는 트리플 크라운을 받았다.

 

CDT 코스
로키산맥(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