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자료

브레히트, 시에 대한 글들

[중산] 2021. 10. 1. 14:46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요컨대 시라는 것은, 예쁘게 울리지만, 카나리아의 지저귐과는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시를 대할 때 사람들은 잠시 그 시에 머물러 그 시에서 무엇이 아름다운지를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고향, 내 슬픔이여

어스름 속에 놓인 땅이여 -

하늘, 그대 나의 푸르름이여

그대, 나의 기쁨이여

 

과연 이 시에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시인은 자신의 고향을 ‘어스름 속에 놓인’ 땅이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스름이라는 것은 어두움이 밝음에 자리를 비켜줄 때 찾아오는 낮과 밤 또는 밤과 낮 사이에 놓인 하루의 시간대를 말합니다.

 

그것은 하루 중 음울한 시간대이며 프랑스인들이 ‘개와 늑대’사이라고 말하는 시간입니다. 또는 선과 악을 제대로 구분하기 힘든 시간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조국이 비인간적인 파시즘 치하로 떨어졌을 때의 어스름이 있었으며 또 파시즘이 파괴된 후 사회주의 아침이 시작되었을 때의 어스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조국은 ‘고향, 내 슬픔’이며 동시에 ‘그대, 나의 기쁨’이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그가 3행에서 노래한 것처럼 그의 기억에는 비록 늑대들이 지배하고 있다고 해도 다칠 수 없는 조국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 시는 내용이 참 아름답습니다. 그 이유는 시인의 감정이 심오하고 고귀하기 때문인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비록 악이 조국을 지배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고향을 슬픔으로써 사랑하고 또 선한 것이 힘을 잡게 된다면 기쁨으로 자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늘, 그대 나의 푸르름이여’ 역시 정이 넘치게 들리기 때문에 아름답습니다. 시인에게는 단지 그 한 단어‘푸르름’만이 필요했으며 벌써 이것만으로도 하늘은 빛을 발하게 됩니다. 또한 시의 리듬 역시 아름답습니다.

 

비판적인 태도

비판이라는 것은 그것이 악의로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아니라면 결코 문학을 즐기는데 방해되지 않는다.

 

시의 꽃잎을 뜯어내는 것에 대해

시는 강한 생명력을 갖고 있으며 비판적인 개입도 잘 견뎌 낼 능력이 있다. 잘못된 시행을 찾아내는 것과 훌륭한 시행을 찾아내는 능력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것이며 이러한 능력 없이는 시를 참되게 즐길 수 없다. 시를 접할 때 판단력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시를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다.

 

불규칙 리듬의 무운시(無韻詩)

내가 운(주로 각운)이 없는 시를 발표했을 때 어떻게 그런 것을 시라고 내놓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이따금 받곤 했다. ‘독일 풍자시’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질문은 타당하다.

 

그 이유는 시가 비록 운을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보통 적어도 하나의 고정된 리듬을 제공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최근 내가 쓴 시에는 운(韻)뿐만 아니라 규칙적이고 고정된 리듬조차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비록 규칙적인 리듬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어떤 리듬(끊임없이 교체되며, 약음이 탈락*하고, 또한 게스투스적인**)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다섯 개의 약음과 강음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오각운 얌부스가 갖는 기름 친 것과 같은 매끄러움이 내 마음에는 들지 않았다. 나는 리듬을 필요하기는 했지만 내가 원했던 규칙적이고 지속적으로 딸랑거리는 것과 같은 통상적인 리듬은 아니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도를 해보았다. 희곡의 한 장면에서

 

그들이 그곳에서 늪 수면 위로 북소리를 울리고

내 주위에서 말과 석궁들이 가라앉은 이후로

내 머리는 정신을 잃었다. 모든 이들이 이미

익사하고 이제 모든 것이 끝나 버려 소음만이

남아 공허의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있단 말인가? 내가

그렇게 달릴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었구나.

 

라고 쓰는 대신 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 북소리가 들리고, 저 늪이 투석기와 석궁들을

빨아들인 이후로, 제정신을 잃었다.

내 어머니가 낳아 준 아들의 머리가, 헐떡이지 말아라!

모든 이들이

이미 익사하고 모든 것이 끝나 버려 단지 소음만이

하늘과 땅 사이에 아직 걸려 있단 말인가? 나 역시 다시는

말을 달릴 필요가 없구나.

 

* 약음이 탈락 : 강음사이에 있는 약음을 생략함으로써 강음끼리 충돌하게 하여 낭송할 때 휴지부를 많이 만들어 낸다. 진코페(Synkope), 음악에서는 싱커페이션이라고 부름. 얌부스나 트로헤우스 율격이 약음과 강음이 규칙적으로 반복되면서 조화롭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반면, 이 진코페 기법을 사용하면 충돌하는, 끊어 있는 느낌이 난다.

 

** 게스투스적인 : 브레히트는 시에서 언어 역시 자각의 주관적인 표현의 수단이 아니라 사회적인 제반 관계를 드러낼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는 입장에서 ‘게스투스적 언어’를 개발했다. 제스처가 개인적인 표현 방법이라면 게스투스는 인간이 서로 어울려 사는 사회의 경제적-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간주관적이고 사회적인 개념이다.

 

음악이 리듬감이 있기는 하더라도 규칙적이지 않은 리듬을 사용했듯이, 운이 없을 뿐 아니라 리듬까지도 불규칙한 시들을 많이 썼다. 아주 특정한 테크닉을 개발하였는데 나는 그것을 게스투스적이라고 불렀다.

 

넓고 다양한 사실주의 서술 방식

어떤 작품이 사실주의적이냐 아니냐의 여부는 오직 이 작품을 작품 속에서 다루어지는 현실과 대립시켜 볼 때만 판단 가능하다. 여기에는 준수되어야 할 어떤 특별한 형식이 잇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적 소설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글을 썼음에도 위대한 사실주의 작가라 불리는 영국의 혁명 시인 셸리를 소개한다. 그는 사실주의적인 서술 방식의 일반적인 묘사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있음에도 뛰어난 사실주의 작품으로 평가한다. 우리는 사실주의적인 서술방식에 대한 정의를 변모, 확장하고 보완해야 할 것이다. 

 

퍼시 셸리(1792~1822)는 맨체스터에서 런던으로 움직이는 무시무시한 행렬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행진 도중 나는 살인을 만났네-

그는 캐슬레이(영국 보수정치인)처럼 가면을 쓰고 있었네-(...)

살이 오를 대로 오른 이 개들은

튼튼하고 억세 보였네,

그가 자신의 넓은 외투에서

개 한 마리당 인간의 심장 두 개씩을 꺼내

개들에게 던져 주었기 때문이라네.

 

노 젓기, 대화

저녁. 두 척의 작은 배가

나란히 미끄러지듯 나아가고 있다.

안에는 알몸의 사내가 한 명씩 타고 있다.

서로 나란히 노 저으며

그들은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노 젓는다. (1953년 여름/12, 307)

 

이 시에서 ‘노 젓기’는 육체적인 행동으로, 다시 말해 실천적 행위로 ‘대화’는 정신적인 행위로 해석 가능하다. 이 시는 1953년 동독에서 일어난 노동자 봉기 직후 브레히트의 별장 앞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는데, 시의 화자는 이 호수 위에 지나가는 배와 뱃사공을 보고 있다.

 

배 안의 젊은 사공들은 대화를 나누면서 노를 젓고, 노를 저으면서도 계속 말을 한다. 브레히트는 이러한 감정을 보며 자신의 시가 말을 하는 행위이면서도 단지 말에 그치지 않고 실천을 추구했던 행위라고 스스로 진단한다. 시를 쓴다는 것은 사회적 실천이다.

 

1. 시는 결코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시의 수용은 눈으로 보는 것이나 귀로 듣는 것과 유사한 작용이며 다시 말해 능동적인 것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인간적인 행위로서, 모든 모순성과 가변성을 지니며 역사를 규정하면서 또한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사회적 실천으로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차이점은 단순한 ‘반영’이냐 아니면 비판적 반영이냐에 있다.

 

<‘브레히트, 시에 대한 글들‘ P215 중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이승진님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출판>

* 베르톨트 브레히트(1898~1956) : 희곡이외에도 2,300여 편의 시를 쓴 빼어난 시인이기도 했다. 그의 시가 일반 독자들에게도 알려지게 된 것은 1960년대 말 독일 경제의 침체와 나치 청산, 교육제도의 개혁, 베트남 전쟁 등 대내외적인 요인으로 인해 68운동이 일어나면서 독일 사회가 변혁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면서부터다.

 

기장 일광해수욕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