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자의 전략 분석
고대 그리스 현인 중 질투를 논한 인물로 이소크라테스Isocates를 들 수 있다. 그는 고르기아스와 소크라테스를 스승으로 섬긴 인물이다. 이소크라테스는 플라톤과 나란히 그리스 교양 이념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런데 이소크라테스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데다 지혜와 언변이 뛰어나고 많은 제자를 두어 종종 질투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너무도 잘 아는 사람조차 질투에 휩싸여서 다른 소피스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감정에 빠진 채, 나를 오해하는 이들을 보면서 쾌락을 느낀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소크라테스는 질투에 대해 분석하여 무엇이 질투를 부추기고 어떻게 해야 그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지 다양한 전략을 논했다.
이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질투자는 무언가 구실을 붙여서 칭찬을 아끼거나 일부러 다른 것을 요란하게 칭찬한다. 왜냐하면 질투자는 ‘실천적 언사를 포함하면 자신의 명예가 높아진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소크라테스는 엘리트를 향한 대중의 질투심에 부정적이었는데 대중이 가지는 평등주의적 질투는 우월한 자의 파멸을 바라는 악의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저 엉뚱한 곳을 향한 불만으로 여긴 것이다. 이소크라테스의 엘리트주의적 태도에서 ‘질투의 정치에 대한 그의 경계심 가득한 비판은 현대 우파 정치가에게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는지 모른다.’고 평가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이소크라테스는 부를 나누지 않는 엘리트를 비판하기도 하였으므로 이 부분에서 이소크라테스를 단순하게 평가하기는 어렵다.
질투와 증오
제정 로마 시대 그리스인 역사가인 플루타르코스는 질투와 증오에 비슷한 점이 있음을 인정하되 두 감정을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첫째, 증오는 나쁜 인간을 대상으로 하지만 질투는 상대의 선악과 상관없이 그의 행복을 보는 것만으로 생겨난다. 또, 증오에는 한도가 있지만 질투에는 한도가 없다는 점도 중요하다.
둘째, 증오는 이성이 없는 동물을 향해서도 일어날 수 있으나 질투는 오로지 인간을 향한다.
셋째, 증오는 대부분 정당성이 있는데 반해, 질투가 정당하게 발생하는 경우는 없다. 증오해야 할 대상에게 반감을 보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런 놈을 편들다니’하고 비난하는 일까지 있다.
그러나 질투는 좀처럼 밖으로 드러나는 일이 없는데 우리가 누군가를 질투하고 있다고 공언하지 않는 이유는 질투에는 정당한 이유가 없을뿐더러 마음 어딘가 켕기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질투를 받는 인물이 극단적으로 행복해지거나 불행해지면 보통 질투심은 작아지는 데 반해 증오는 사라지지 않는다.
‘상대가 행복해지든 불행해지든 증오는 그 본성상 사라지지 않으나, 질투는 상대가 어느 쪽으로든 과잉 상태에 이르면 약해지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이런 지적은 질투가 자신과 비교 가능한 사람만을 향한다는 특성과 관련이 있다. 질투하는 상대가 비교 불가능한 수준으로 성공하거나 몰락하면 그 인물은 질투 후보자 목록에서 제외된다.
질투를 느꼈다 해도 죄의 경중은 이성의 승인 여부에 달렸다. 질투가 아주 조금 싹텄을 뿐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직 작은 죄라고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논한다.
베이컨의 질투론은 17~18세기 하나의 범례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면 ‘질투는 온갖 곳을 쏘다니는 정념으로 거리를 방랑하며 집에 있지 않는다’ 또는 ‘질투는 가장 집요하고 끈덕진 감정이다’라는 표현에서 베이컨만의 통찰이 엿보인다.
프랑스 철학자 르네 지라르는 욕망에 모방적 성격이 있다. 즉 인간의 욕망에 타자의 존재가 불가결하다고 설명한다. 지라르는 욕망의 성립을 ‘삼각형 이론’으로 표현한다.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일체의 욕망 안에는 대상과 주체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제삼자, 자신이 상대적으로 우월성을 가질 가능성이 있었다고 믿는 경쟁상대가 욕망 안에 존재한다. (…)
주체는 경쟁자가 그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그 대상을 욕망하는 것이다. 경쟁상대가 무언가의 대상을 욕망함으로써 주체는 그 대상을 바람직한 것으로 인식한다.“
지라르에 따르면, 우리의 욕망은 자발적인 것도 아니고 대상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 대상을 욕망하는 또는 소유하고 있는 제삼자의 존재에 기초한다.
다시 말해, 이웃이 그것을 갖고 싶어 하니까 나도 갖고 싶은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어떤 대상에 대한 욕망보다도 타인을 향한 질투가 앞서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타자의 존재가 대상에의 욕망에 선행하고 대상에 대한 욕망을 규정한다. 욕망이 채워지려면 사물만이 아니라 사물을 소유한 자신의 모습을 부러워하며 바라봐 주는 제삼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질투라는 감옥- 우리는 왜 타인에게 휘둘리는가’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야마모토 케이지음, 최주연님 옮김, 북모먼트출판> * 야마모토 케이 : 198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리쓰메이칸 대학 법학부 부교수로 근무하고 있으며 나고야대학교 대학원 국제언어문화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전공 분야는 현대 정치이론, 민주주의론이다. 저서로는<수상한 자의 민주주의-라클라우의 정치사상>,<대립주의 -포퓰리즘 이후의 민주주의>, 공편저서로는 <포스트 대표제의 정치학>등 4권이 있음.
포퓰리즘의 위험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되기 전까지 미국 정치 시스템 자체를 파괴하려는 강력한 정치 행위자는 없었다. 그는 아마도 독재자 후보로 출마한 최초의 주요 정당 후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이겼다. - 마샤 거센(러시아 출신 미국 저널리스트)
높은 불평등, 경제적 불안, 느린 경제 성정, 거대한 금융위기 탓에 주요 고소득 사회의 엘리트에 대한 신뢰가 약화되었다.
결국 포퓰리스트의 당선과 포퓰리즘적 대의명분의 승리로 이어졌고, 이는 대개 나쁜 정책으로 이어진다. 나쁜 경제가 나쁜 정책을 낳고 악순환의 고리를 형성할 위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런 힘들이 자유로운 사회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트럼프가 미국 기업을 향해 중국을 떠나라고 ‘명령’한 것은 독재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이 말을 듣기 좋아하는 이유는 대통령이 ‘미국의’ 기업들은 미국의 (사실은 자신의)정치적 우선순위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이 다시한번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이에 우리는 민주주의의 심장부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 급증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이제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에 맞서고 있다. 권위주의는 매우 다른 두 가지 형태를 취한다. 하나는 ‘선동적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관료적 권위주의적 자본주의’다.
전자는 고소득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한 내부적 위협으로, 이 국가들은 결국 그런 형태로 변질될 수 있다.
후자는 고소득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국가들에 대한 외부적 위협으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요인이다. 예컨대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중국이 운영하는 시스템이다.
첫 번째 버전은 두테르테의 필리핀, 에르도안의 튀르키에, 카친스키의 폴란드, 오르반의 헝가리, 푸틴의 러시아에서 볼 수 있다. 머잖아 보우소나루의 브라질과 모디의 인도에서도 등장할 수 있다.
두 번째 버전은 중국과 베트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정권은 유교적 전통의 능력주의, 그리고 민심에 반응하는 관료제를 공산당 국가의 시장 중심 경제에 결합했다.
에르도안, 오르반, 푸틴이 그랬던 것처럼(일시적인)권력을 이용해서 독립적인 기관들과 야당을 억압한 다음 절대적인 통치자로 부상한다.
이런 식으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변질된 후 노골적인 독재로 이어진다. 쿠데타나 혁명을 일으키기보다는 말벌 애벌레가 숙주를 잡아먹듯이, 독재자가 되려는 사람이 내부에서 민주주의를 먹어 치운다.
이런 정권은 정치를 탈제도화하여 정치를 개인화한다. 자의적인 통치와 그 휘하에 있는 법원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정부다.
이런 시스템에서 포퓰리즘의 악덕과 전체주의적 악덕이 결합한다. 포퓰리즘의 악덕은 단기주의, 전문성에 대한 무관심, 장기적인 고려보다 당장 정치적인 것을 우선시하는 것 등이다.
전체주의적 악덕은 부패와 자의성이다. 이 두 가지는 경제적 비효율성과 장기적인 실패를 초래한다. 이런 정권은 큰 규모로 도둑질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의 정치는 국민에 대한 사랑이라는 외피 아래 숨겨진 거짓, 억압, 도둑질의 정치다. 궁극적으로 이런 형태의 권위주의는 악랄한 갱스터 국가를 만들어 낸다. 푸틴의 러시아가 가장 중요한 현대적 예다.
크라스테프와 스티브 홈스는 현재 러시아를 포함하여 중부 유럽과 동유럽에 만연한 이런 권위주의는 냉전 이후에 당시 승리했던 서구를 모방하기 위해 서두르다가 역전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방이 실패한 데 대한 반작용으로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선동가들이 인기를 얻게 됐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용어다.
어떤 이들은 용어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러기는 어렵다. 포퓰리즘에는 엘리트에 대한 적대감과 다윈주의에 대한 거부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포퓰리즘을 배타적인 형태의 정체성 정치로 이해하면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에 위험을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출된 권위주의자는 어떻게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추구할까?
2016년 5월 선거 유세 당시 트럼프는 “오직 중요한 것은 국민의 통합뿐이며 국민이 아닌 이들은 의미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이는 파시즘이다.
반엘리트주의와 반다윈주의라는 두 가지 신념이 결합하면 정치적 반대자, 정당들, 독립적 법원 특히 헌법재판소, 독립적 관료제, 언론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이런 포퓰리스트들에게 “‘국민 자신’은 기존의 민주적 절차 밖에 있는 가상의 존재로, 민주주의에서 실제 선거 결과를 부정하면서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려는 동질적이고 도덕적으로 통일된 집단이다.
이런 입장을 가진 지도자는 법위에 군림하고 영원히 집권하기를 바라며 독재자가 되기를 원한다.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 독재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네 가지 징후가 있다.
즉 그들은 민주적 게임 규칙을 거부하거나 지킬 의무가 매우 약하고, 정치적 반대자의 정당성을 부정하며, 폭력을 용인하고 조장하며, 언론을 포함한 반대파의 시민적 자유를 축소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선출된 권위주의자는 어떻게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을 추구할까? 첫째, 심판자, 특히 검찰, 사법부, 선거관리기구, 세무 공무원들을 전복한다.
둘째, 자신의 반대자들 그리고 잠재적으로 독립적인 인물들을 괴롭힌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언론에 대한 통제다.
셋째, 독재자가 되려는 사람은 헌법이나 선거법을 변경하여 선거를 통해 도전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려고 할 것이다. 미국 남부는 짐 크로 법(미국 남부의 인종차별 법의 통칭)그렇게 했고, 히틀러에게 전권을 장악케 해준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 화재다.
좌파 포퓰리스트는 착취적인 기업 및 금융 엘리트에 대항하여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한다고 주장한다. 중도 포퓰리스트는 더더욱 찾아내기 어렵다. 이탈리아의 오성운동이 대표적인 현대적 사례다.
우파 포퓰리스트는 좌파 포퓰리스트와 마찬가지로 엘리트에 반대하지만, 이들은 일반적으로 경제계 및 금융계 엘리트가 아니라 학계, 관료, 문화엘리트를 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엘리트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인 혐오증과 소수 인종에 대한 적대감을 갖고 있다. 궁극적으로 포퓰리즘은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위기‘ P655중 에서 극히 일부 요약 발췌, 마틴 울프 지음, 고한석님 옮김, ?Page2출판> * 마틴 울프 : <파이낸셜타임스>의 수석 경제 평론가다. 2011년 영국의 비커스 은행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런던정경대학교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는 금융저널리즘 공로로 대영제국훈장을, 2019년에는 전 세계의 경영 및 금융 전문 언론인에게 수여하는 제럴드 로브 어워드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저서로는 <금융공황의 시대>, <변화와 충격>,<세계화는 왜 작동하는가>등이 있다.